판사 ‘정상참작’ 재량권 크게 줄어

  • 입력 2005년 9월 13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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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千正培) 법무부 장관이 12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천명한 ‘양형기준법’ 제정 방침이 현실화할 경우 그 파장은 예상보다 훨씬 클 것으로 전망된다.

법무부의 한 간부는 “형사 사법의 틀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인식 등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량이 대폭 줄어드는 법원과 재야 법조계 등의 반발도 클 것으로 예상돼 법 제정 추진 과정에서 검찰 법원 재야 법조계 간의 마찰과 갈등이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들쭉날쭉 판결 사라져=양형기준 제정에 관한 논의와 주장은 이전에도 법원과 검찰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법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사건에 대해서 판사에 따라 천차만별인 양형의 문제점이 심각하게 제기됐고 이에 따라 양형기준을 정하려는 노력과 시도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양형기준 논의는 모두 ‘참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 장관이 제정하겠다고 천명한 양형기준법은 검사와 판사에 대한 구속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미 이 법안의 개략적인 내용까지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범죄 등급을 세로축에, 범죄 경력을 가로축에 놓은 양형기준표를 만든 뒤 범죄 유형과 내용 등을 점수로 매겨 해당 형량을 정해 놓는다. 점수별 양형의 간격은 ‘징역 1년∼1년 6개월’ ‘1년 6개월∼2년’ 식으로 세분화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양형기준의 법제화가 추진되는 것은 처음이다. 미국은 1987년 연방법으로 ‘양형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격렬한 논란 예상=양형기준법이 제정되면 법원 판결에 대해 사회적인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지게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대검찰청의 한 검사는 “양형기준법이 제정되면 무엇보다 국민의 사법 불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타협 판결과 비리 거물에 대한 봐주기 수사, 봐주기 판결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과 재야 법조계는 강하게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법원의 경우 판사의 재량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형량을 정하는 것이 오히려 구체적인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다는 판사들의 지적도 많다. ‘선처’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행정부인 법무부와 입법부인 국회가 판사의 ‘법과 양심에 따른’ 양형을 제한하는 결과가 돼 ‘3권 분립’을 저해하는 것 아니냐는 반박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변호사들도 의뢰인과의 관계에서 ‘역량’이 크게 줄어드는 결과가 돼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이와는 별도로 법무부의 법 제정 추진이 법원 및 재야 법조계의 의견수렴 없이 갑작스럽게 추진되는 측면이 있어 격렬한 논란과 반발이 예상된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기준 벗어난 판결은 외부기관이 심사▼

사기죄에 대해 형법은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법관의 판단에 따라 양형의 차이가 컸다. 재판부에 따라 구속과 불구속으로 갈리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양형기준법이 제정되면 판사는 미국처럼 ‘양형기준표’라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피고인의 양형을 정하게 된다. 법관마다 들쭉날쭉한 ‘고무줄 형량’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법원에 대해 사회적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진다는 의미도 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밝힌 양형기준법에 따르면 국회는 법조인과 교수, 시민 등 13명으로 구성된 양형위원회를 설치해 매년 실정에 맞는 양형 기준을 마련한다.

범죄 등급은 △범죄 유형 △범행 수단과 결과 △범행 후 정황 △피고인의 역할 △수사 협조 등의 항목으로 구성된다. 범죄 전력은 △전과 △동종 범죄 경력 △집행유예 기간 중 범행 여부 등으로 정한다.

양형위원회는 양형 기준의 제정 개정과 연구뿐만 아니라 양형 기준을 벗어난 판결에 대해 법원에서 자료를 받고 심사하는 권한을 갖는다. 법관은 양형 기준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유를 밝혀야 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법이 시행되면 구속이 필요 없는 사람을 과감히 석방할 수 있게 돼 인권 신장에 기여할 것”이라며 “재판은 물론 기소 단계부터 양형 문제가 투명해지기 때문에 전관예우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국회의원 때부터 정치인, 공무원 등이 관련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선 각종 선처 사유를 들어 관대하게 처벌하는 데 반해 절도 등 ‘블루칼라’ 범죄는 엄벌하는 것이 사법 불신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 왔다는 게 천 장관 측근들의 이야기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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