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태동/위기감의 뿌리를 생각할 때

  • 입력 2003년 5월 22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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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적인 칼럼니스트 마이클 킨슬리는 지난달 시사주간지 ‘타임’에 발표한 ‘한 사람의 힘’이라는 글에서, “‘위대한 사람에 대한 역사이론’은 지난 수십년간 퇴색해왔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한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만은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직설적 ‘말’의 부메랑 현상 ▼

취임한 지 100일이 다 되어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 리더십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도처에서 연속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집단적 힘’에 의해 위기감을 느끼며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실린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대통령의 좌절감은 어찌 보면 리더십 부재에서 오는 자업자득의 결과가 아닐까. 진보적인 집단세력을 등에 업었다는 부담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정치와 노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내다보는 이성적 냉철함과 균형감각을 잃은 듯한 판단을 내리곤 했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두산중공업과 철도노조 파업사태, 그리고 화물연대의 물류 투쟁 등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보인 ‘무릎꿇기식 임기응변’을 보면서, 일찌감치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릴 ‘집단적 힘’의 발호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지금 교육보다 이념적인 정치투쟁에 치중하는 전교조의 저항, 대통령의 방미외교에 반발한 한총련의 기습 시위, 공무원 노조의 파업 위협 등으로 심각한 불안의 수렁으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은 대통령의 ‘저돌적 다변(多辯)과 일관성 잃은 리더십’ 때문이란 시각도 없지 않다. 그동안 노 대통령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편리한 말들을 가볍게 해왔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나라 전체가 혼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위기 상황에서 국익을 위해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처절한 인식과 이에 따른 변신과, 순간의 어려움을 쉽게 모면하기 위한 변신은 다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는 미숙한 경험 때문에 그가 무절제하게 사용한 직설적이고 감성적인 ‘말’이 가져온 부메랑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지금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자신의 변신 이유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더 이상 감성적인 말로 국민을 당혹시키면 더 큰 수렁에 빠져버릴 것이다. 말은 의사전달의 수단이지만 말하는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말이 곧 행동”이기 때문에 그가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위와 위엄을 잃을 수도, 얻을 수도 있다. 대통령이 국내문제는 물론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다시 흔들린다면 자신은 물론 국민들까지 겉잡을 수 없는 혼돈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의 대통령’ 리더십 기대 ▼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게 비극적인 것만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그는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다. 비록 그가 일부 지지층을 잃더라도 국가 발전을 위해 옳다고 판단하면, 그 일을 위해 현명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보다 성숙하고 뿌리 깊은 ‘말없는 다수’로부터 지지와 믿음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비극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눈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원대한 비전과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이성적인 대통령으로서 리더십을 펼쳐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역사를 움직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킨슬리씨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부시의 리더십을 두고 수십년 동안 퇴색해온 ‘위대한 사람과 역사의 관계’를 다시금 언급한 것이 노 대통령에게 결코 우연으로만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태동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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