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의 24시

  • 입력 2003년 5월 1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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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4월28일 오전 11시 청와대 춘추관 1층의 브리핑 룸. 송경희(宋敬熙) 청와대 대변인이 이날의 오전 정례브리핑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이미 자리를 잡은 40여명의 기자들은 모두 송 대변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리핑은 K-TV로 매일 생중계되기 때문에 11시 정각 ‘큐’ 사인이 있기 전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변인과 기자들 간에 일전(一戰)을 앞둔 고요함이다.

송 대변인이 이날 오전 9시부터 열린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나온 주요 내용을 간단히 브리핑한 뒤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이 때부터는 TV중계가 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의식해 표정을 다잡고 있던 송 대변인의 얼굴도 약간은 풀어진다.

●‘사자밥으로 던져지는’ 브리핑 시간

큰 현안이 없는 날이었지만, 16분 동안 21개의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남북장관급회담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는 없었나”, “안희정 염동연씨가 검찰에 소환되는데 특별한 얘기가 없었느냐”, “국정원 후속인사는 어떻게 돼 가나” ….

질문은 개별 기자의 관심 방향에 따라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산발적이었지만, 중반쯤에 접어들면서 송 대변인의 브리핑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철도산업 구조 개편’ 문제로 모아졌다. 오전 9시반에 김만수(金晩洙) 부대변인이 회의 분위기를 기자실에 전하기 위한 ‘맛보기’ 브리핑에서 한 마디 운을 뗐던 사안이다.

-철도산업 구조개편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얘기가 있었다는데….

(‘그런 보고 없었다’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답변으로 예봉을 피하던 송 대변인은 이 대목에서 노트를 뒤적였다. 대통령의 ‘워딩’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원점 재검토 얘기는 없었고…. 그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토론하자는 얘기죠.”

―철도는 공사(公社)화하기로 정리가 됐는데, 뭘 다시 토론한다는 거죠.

“정부 방침이라는 것은 이미 천명했고, 제 해석이지만 공사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송 대변인은 어쩔 수 없이 ‘나의 해석’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온 겁니까.

“전체 노사문제, 춘투 얘기하다가….”

몇 개의 질문이 더 나왔지만, “정책실에 정확하게 확인해서 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이쯤 되면 브리핑을 끝낼 때가 됐다. 기자들의 표정에서 ‘더 이상 나올 게 없겠다’는 듯 전의(戰意)가 가라앉는 분위기다. 이때 브리핑 룸 뒤쪽에서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던 유민영 대변인 보좌관이 손으로 ‘X’자를 그려 신호를 보냈다. 이제 브리핑을 끝내자는 신호였다.

청와대의 취재시스템이 ‘대변인 브리핑’ 중심으로 바뀐 뒤 송 대변인은 매일 혹독한 시험을 치르고 있다. 과거의 대변인 브리핑은 특별한 현안이 없는 경우 대통령의 동정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에 그쳤지만, 비서실 출입이 금지되면서 기자들은 1차적으로 대변인의 입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거꾸로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때문인지 ‘6하원칙’에 맞는 확실한 답이 나오기 전까지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되고,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는 워치콘 발언 파문과 같은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몰라요’로 데뷔한 브리핑 시대 첫 청와대 대변인의 요즘 모습―. 송 대변인에게 브리핑은 힘든 시간이다. 한 기자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브리핑이 끝난 뒤 그 기자에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라고 말했을 정도다.

기자들의 까다로운 질문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3월 중순경 ‘나종일(羅鍾一) 국가안보보좌관이 러시아 천연가스 개발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복안으로 갖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나 보좌관이 러시아와 중국을 방문하는 중이어서 사실 확인의 부담은 모두 송 대변인에게 떠넘겨졌다.

결국 해당 신문의 기자가 해명서를 보내오는 등 기사가 다소 과장된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A기자가 ‘확인사살을 하겠다’는 듯 해명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송 대변인은 “보여드리기는 어렵고 몇 문장만 읽어주겠다”며 해명서의 핵심적인 대목을 읽어줬으나, 이번에는 A기자가 “그런 편지를 공개해도 돼요?”라고 질문했다.

“A기자가 보여달라고 한 것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물컵을 쥐고 있던 송 대변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7 to 9 일상… 집에까지 전화 빗발

송 대변인의 일과는 오전 7시에 시작된다. 오전 6시반 경 서울 양천구 목동 집을 나와 청와대에서 제공한 운전기사 딸린 레간자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는 도중에 조간신문을 빠른 속도로 훑는다.

창 밖 양화나루에는 연두색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거기에 눈길을 줄 틈이 없다. 조간신문에 곧바로 확인해야 할 사안이 보도됐을 때는 이른 시간이지만 해당 수석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SOS 신호를 보낸다.

“오늘 ○○일보에 기사가 났는데, 어떻게 된 거죠? 기자들이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직접 브리핑에 나오실 수 있는지요. 어려우시다면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필요한 자료를 보내주세요.”

브리핑에 직접 나서겠다는 답을 들으면 다행이지만, 스케줄이 빡빡해 곤란하다는 답을 들을 때가 더 많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보좌관 2명과 회의를 갖는다. 대변인 보좌관은 3월 중순경 1명에서 2명으로 늘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개인사업을 한 경험도 있는 임유 보좌관과 386 운동권 출신인 유민영 보좌관이 미리 만들어놓은 예상 질문 답변서를 건네준다.

오전 9시 청와대 회의가 열리는 시간이다. 월, 금요일에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회의, 화요일에는 국무회의, 목요일에는 국정과제회의가 고정적으로 열린다. 하나같이 중요한 국사(國事)가 논의되는 회의들이고, 모두 대변인이 챙겨서 브리핑해야 한다.

회의나 행사가 끝나면 메모를 토대로 브리핑할 내용을 신속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 때는 직속상관인 이해성(李海成) 홍보수석과도 짧께 협의한다. 보통 오전 10시반쯤 회의가 끝나면 11시 브리핑 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30분 내에 모든 준비과정이 끝나야 한다. 매주 화요일은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다. 오전 9시 시작되는 국무회의가 낮 12시경 끝나고, 오후 1시에 브리핑하기 때문에 따로 식사를 할 겨를이 없다.

오후 조간신문의 마감시간이 지나고 일단 한숨을 돌린다. 저녁 행사가 있으면 오후 9∼10시에 퇴근하고 1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오후 6시반 정도에 퇴근한다. 초저녁 조간신문 가판에 뭐라도 난 경우에는 퇴근 후에도 기자들의 확인전화가 빗발친다. 처음에는 기자들이 집 전화로 걸어오기도 해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 휴대전화로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기자들이 “왜 휴대전화를 잘 받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벨소리를 진동으로 해놓거나, 휴대전화를 가까이 두지 않은 바람에 벨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이후로는 집에서 샤워를 할 때도 휴대전화를 꼭 챙겨 가지고 욕실에 들어간다고 한다.

송 대변인의 개인적인 고충은 무엇보다 머리 손질이다. 청와대에 이발소는 있지만, 여자 직원을 위한 미용실은 없다. 매일 TV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형편이라 머리 손질은 기본이지만 출근 전 꼭두새벽에 미용실에 들렀다가 올 수도 없다. 그래서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저녁 일정이 없는 틈을 타 미용실을 찾는다. 송 대변인은 2월 25일 데뷔 때 긴 머리였으나, “좀 어수선하다”는 지적이 있자 3월 하순쯤 단발로 스타일을 바꿨다.

● “청와대엔 미용실이 없다”

의상도 개인적으로 챙겨야 한다. 이전의 박선숙(朴仙淑) 대변인은 브리핑 생중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 달에 서너 벌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송 대변인의 경우 1주일에 두세 차례 옷을 바꿔 입는다. 초창기에는 검은색 감색 정장을 입었지만 최근에는 오렌지색 연두색 등 밝은 색상을 즐겨 입는다. 액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브로치는 물론 목걸이 반지 등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으로 ‘연구’에 전념하던 주부에서 갑자기 청와대 대변인이란 자리에 오다보니 얼마 전에야 난생 처음 ‘폭탄주’ 맛을 보기도 했다. 4월19일 홍보수석실에서 단합대회 겸 등산을 하고 난 뒤였다. 효자동 근처의 음식점에서 뒤풀이를 하던 중 폭탄주가 돌았고, 송 대변인은 여직원들의 강권으로 한 잔을 마셔야 했다.

취임 초 몇몇 기자들이 송 대변인을 초청한 저녁 자리에서 폭탄주가 돌았던 적이 있다.

송 대변인은 “나는 술은 한 방울도 못해요. 맥주 반 잔만 마셔도 가거든요”라며 사양했고, 기자들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 폭탄주가 대여섯 순배 도는 가운데도 한 두 명의 기자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취재하는 모습을 본 송 대변인은 “이렇게 마시고도 또 취재를 하러 가나요”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날 술자리를 마치면서 송 대변인은 “정말 잘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전공했던 분야가 언론학이고, 나는 여러분 편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송 대변인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듯하다. 새로운 취재시스템이 요구하는 ‘강철’ 대변인 역할에 배겨날 장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게 청와대 사람들의 얘기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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