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내셔널 어젠다위 제안]<1>한미관계

  • 입력 2002년 12월 23일 17시 48분


레이건 비무장지대 방문-83년 11월 방한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측 진지를 응시하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시청 앞 광장에 5만여명이 모여 미군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집회를 가진 사건은 한미관계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또 새로 출범하는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축인 한미동맹을 앞으로 어떻게 열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사건이었다.

추모 집회 열기는 일차적으로 여중생 사망 사고와 관련한 미군 당국의 대처 방식에 대한 한미간의 인식 차이가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해외 주둔군의 공무 중 사고 처리에 대한 국제 관행과 미국식 법 제도를 내세운 반면, 우리는 미국의 그 같은 처리방식이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사태가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구조적 원인이 내재돼 있다. 이 사건은 한반도 주변의 대내외적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데 비해 기존의 한미관계의 틀이 이를 따라가 주지 못한 데서 이미 예고됐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수로 부지 착공-97년 북한 금호지구에서 열린 경수로 부지 정지공사 착공식.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은 1987년 이후 급속도로 민주화돼 왔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해졌고,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한미관계는 80년대 초 권위주의 정부가 국내에서의 취약한 정통성을 미국의 지지를 동원해 보완하고자 했던 때의 당당하지 못한 관계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국민 일반에는 적지 않다.

이 같은 상황변화가 바로 이번 대선에서 성숙하고 대등한 한미관계 수립의 문제를 중요 쟁점으로 등장시키게 된 배경일 것이다.

다음으로 대외적 환경 변화를 보면 세계 정치는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넘어선 지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한반도만이 유일하게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다.

물론 한국은 지난 5년간 여기서 벗어나 탈냉전 화해·협력 구조로 이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눈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냉전적이고 대결적인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즉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당위적 방향과 미국의 대북 정책의 간격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촉발시킨 두 번째의 중요한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올브라이트 北방문-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배.동아일보 자료사진

결국 앞으로 5년간 한국 외교의 핵심은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간격을 어떻게 좁혀 나가면서 우리 국익을 달성할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즉 한국의 국내정치 민주화와 한미관계, 탈냉전으로의 이행과 미국의 대북정책의 간격을 좁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우리 외교의 급선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외교가 그동안 제 역할을 했다면 이번 촛불시위와 같은 반미감정의 확산은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실제로 수행하는 외교관들이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이 같은 간격을 좁혀 나가겠다는 문제 의식을 새롭게 다지는 것이 우리 외교의 첫 번째 과제일 것이다.

둘째로 한미동맹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과거 40년 동안 한미동맹은 한국의 고속성장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안보환경을 제공해 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이제 우리는 남북관계를 냉전 대립에서 탈냉전 화해·협력으로 전환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평화를 보장하는 도구로 한미동맹을 활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냉전 때처럼 미국에 모든 것을 맡기는 종속변수적 자세가 아니라 분단과 대결이라는 우리 민족의 해묵은 숙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미국을 활용한다는 독립변수적 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DJ-부시 정상회담-2001년 10월 상하이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동아일보 자료사진

셋째로 그동안 문제가 돼 온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용산기지 이전 등 여러 가지 현안들도 별개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한반도 평화정착, 즉 북한문제의 해결이라는 큰 전략적 틀 안에서 풀어나가도록 미국과 진지하게 협의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북한 핵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에만 매달리고, 미사일 문제가 터지면 미사일 문제에만 매달리는 즉자적 대응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발상을 바꾸어 한반도 평화체제의 큰 틀을 짠다는 거시적 시각과 목표를 가지고 종합적 맥락에서 개별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그러한 장기적 목표를 설정하고 시행해 나갈 때 여론의 지지를 최대한으로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대북 정책과 한미관계에 관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수렴하고 필요할 경우 국민을 설득하기도 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외교 인력과 제도가 보강되어야 한다.

한국은 세계화와 탈냉전이라는 국제적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는 외교 인프라의 확충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투에 나갈 병사에게는 무기와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 주면서 승리하기를 요구해야 한다. 사실 그동안 빈번한 외교 관련 사고도 이 같은 외교 인프라 부실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환경이 변할 때 한 국가의 외교 목표도,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도 변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과 함께 숨쉴 수 있는 역동적 외교를 해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외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갈 때 국민의 마음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반미감정이 사라질 것이고 건전한 한미동맹관계를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국가목표도 달성해 나갈 수 있다.

대표집필 윤영관 서울대 교수 국제정치학

▼미국의 시각▼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직면한 대외 상황, 특히 한미관계는 북한 핵문제와 선거기간 중에 표출된 반미감정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어 조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 언론은 한국의 대선 기간에 분출된 반미감정 문제와 관련해 노 당선자는 보다 냉정한 각도에서 한미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노 당선자가 선거 직전 미국과 북한간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은 사실상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음을 지적하면서 “노 당선자의 선출을 가능케 했던 한국의 부유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노 당선자는 미국과 함께 갈 것이라는 분명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주문을 요약하면 노 당선자가 한미간의 전략적 시각차를 좁혀야 하며, 특히 한미동맹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대미정책의 우선 순위를 선정해 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간, 그리고 한미일간의 최우선 과제는 역시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긴밀한 외교적 협의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노 당선자는 미 정부가 당장 내년부터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점, 한국 정부와 국민이 미군 주둔을 원치 않을 경우 언제라도 철수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노 당선자에게는 이 같은 미국측의 기류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노련한 외교 안보 전문가들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교는 국가와 국가의 냉정한 이익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노 당선자가 한미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열어갈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이정민 연세대 교수·국제관계학

▼한국외교 인력확충-人事혁신 이뤄야▼

냉전 체제하에서 한국 외교는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 그렇기에 우리 나름대로의 외교 전략이 없어도 생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함께 중국 러시아 동유럽과도 외교가 열렸고 북한도 대외 관계의 범주 안에 들어왔다. 우리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전략개념과 문제해결 능력이 없이는 생존이 힘들고 외교 사고도 빈번히 일어나게 돼 버렸다.

통상은 물론 금융 통화 인권 환경 등으로 외교 영역이 확대됐고 유엔,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기구 외교도 중요해졌다. 이러한 세계화 외교를 담당할 전문성을 갖춘 외교관을 양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외교 관료 조직은 이러한 전문성을 제고하는 운영 시스템이 아니다. 냉전시대 때의 업무 스타일이 남아 있어서 본부 간부와 외부기관을 위한 보고서 작성에 치중하는 시스템이다. 이러다 보니 현안을 해결하고 협상하는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에 소홀해진다.

이제 외교부의 인사관리도 학연 지연이 아니라 실무 현안을 타결하고 전략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탁월한 협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우받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외교 인력의 인프라를 보강해 줘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규모는 선진국에 진입하고 있고 탈냉전 세계화로 새로운 업무는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외교 인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인구는 한국의 3분의 1인데 외교관 수는 2배 이상이다. 그런 양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네덜란드는 유럽의 통상 물류의 중심이자 국제 외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중심 국가가 되려면 외교도 이제 커진 몸통에 걸맞은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윤영관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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