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정상회담 한국정부-3强 입장]"동북아 질서재편 분수령"

  • 입력 2002년 9월 17일 18시 59분


마주앉은 北-日 정상- 평양AP연합
마주앉은 北-日 정상- 평양AP연합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북-미 대화와 남북관계 진전에 얼마나 ‘시너지 효과’를 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일본인 납치문제와 미사일 실험발사 유예선언 등 북-일 양국 현안에 대한 해결 의지는 엿보이지만 한반도의 안정기류를 좌우할 미국의 최대 관심사항, 즉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깊숙이 논의한 흔적은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0월에 열릴 수교 회담에서부터 협의할 일본 정부의 경제적 지원 문제도 간단치 않은 사안이다.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피랍 일본인 6명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를 경우 국교정상화 자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일단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한반도 주변정세에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특히 김 국방위원장이 미사일 실험발사 유예를 선언하고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합의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또 김 국방위원장이 직접 일본인 납치 의혹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데 대해 “북한이 성의를 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 속에는 북-일 정상회담 자체보다는 앞으로의 파급 효과가 중요하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들어 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57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후 이날 저녁 귀국한 최성홍(崔成泓) 외교통상부장관은 귀국 즉시 서울 한남동 장관공관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해 북-일 정상회담 결과를 분석하고 향후 대응책을 논의했다. 정부는 북-일간의 추후 협의를 측면 지원한다는 구상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담에서 구체적인 매듭을 짓지는 못했지만, 북한이 앞으로 핵 미사일 문제에서 좀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도 ‘대북 포용정책’의 대열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17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북-일 관계가 잘 되면 북-미 관계에도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와 협력이 있으려면 남북, 북-일, 북-미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 문제가 핵과 미사일 문제였기 때문에 이날 발표된 북-일 공동선언을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할지는 미지수다. 북한측은 미사일 실험발사를 유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미사일 생산이나 수출문제 등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았기 때문이다. 또 핵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없다는 점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피랍 일본인 문제가 급속히 해결될 경우 북한과 일본의 경제협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이 추진 중인 경제개혁도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북-일 관계가 ‘선순환(善循環)’의 엔진 구실을 할 경우 남북관계 개선에도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게 우리 정부의 기대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미국…“北핵문제 해결 우선”▼

미국은 17일 북-일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가장 큰 현안인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관해 북한이 어느 정도의 해결 의지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선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안보 문제에 대해 △관계국간 대화를 촉진해 해결을 꾀하고 △미사일 실험발사 유예조치를 2003년 이후로 연장한다는 의향을 표명한 것으로 공동선언에 나와 있으나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6월 대북정책 검토를 마친 뒤 △북한의 핵 동결에 관한 제네바 북-미 합의의 이행 방안 개선 △미사일 문제에 대한 검증 가능한 협상 △재래식 병력의 감축 문제 등을 대북(對北) 대화의 의제로 삼겠다는 방침을 일관되게 밝혀 왔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16일 북-일 정상회담에 앞서 “나는 일본이 미사일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명치 못한 행동을 할 것으로 우려하지 않는다”고 쐐기를 박은 것은 미국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미국은 최근 북한이 전례 없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진정으로 개혁 노선을 밟고 있는 것이라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한국 일본의 대북관계가 급물살을 타는 상황에서 미국만 뒷짐을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월스리트저널이 16일 “북한의 급격한 태도 변화는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에 포함시킨 근거를 약화시킬 것”이라며 “이는 미국에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도록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전망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은 조만간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북-일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들은 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북한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대북 특사 파견 등 대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중국…“평화정착 발판 마련”▼

중국은 이번 북-일 정상회담의 결과가 동북아 안정은 물론 자국에 유리한 주변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중국의 한 전문가는 “이번 회담은 주변 4강간의 긴장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북-일 관계 개선의 의미를 넘어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과의 대결 구도를 완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주변 4강의 이해가 충돌하는 중심점에 북한이 있었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역 긴장을 조성하는 주된 요인이었으나 이 같은 매개 변수가 바뀌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과 미-일 안보동맹 강화의 빌미를 준 것으로 판단해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의 안보 이익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이 이번 회담에서 핵 문제에 대한 국제규범을 준수하고 미사일 발사를 동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데 대해 중국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확대할 수 있는 명분을 줄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21세기 중반까지 경제 발전을 국가의 기본 이익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평화적 주변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북한 변수로 인해 중국이 미국과 갈등 국면에 접어드는 것은 경제 발전을 통한 종합국력 배양이라는 국가전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국교정상화 교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각종 경제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경제난을 타개할 수 있다는 데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자국의 경제 지원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경제 상황의 호전은 탈북자 문제를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게 중국의 판단이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으나 전반적인 지역 정세를 감안할 때 중국의 대북 후견인 역할이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러시아…“한반도 영향력 확대”▼

러시아는 북-일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과 이익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만족해 하는 분위기다. 지금까지 한반도문제 논의구조에서 소외당했던 러시아는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존의 4자회담 체제의 재편에 기대를 걸 수 있게 됐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97년부터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추진해온 4자 회담에 대해 러시아는 일본까지 포함한 6자 회담으로의 확대를 주장해왔다.

관영 이타르타스 통신은 정상회담 후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동북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일본이 미국의 태도와 대조적으로 북한과의 본격적인 관계 정상화에 나선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북-일 관계정상화는 양국의 이익 뿐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안전에 관계된 것"이라며 회담 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러시아가 북-일 정상회담 성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러시아 관영 언론은 "북-일 정상회담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외교력이 발휘됐다"고 일제히 보도했으며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도 북-일 정상회담을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러시아의 주도적인 노력이 가시화된 결과" 라고 평가했다.

크렘린궁도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날 때마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 탈피와 대화에 의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강조해 왔다"며 지난달 열린 북-러 정상회담이 이번 회담의 성사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바노프 장관이 "북-일 대화가 북-미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며 미국의 강경한 대(對)북 태도 변화를 촉구한 것이나, 북-일 정상회담 직전 일본과 전례없이 긴밀한 사전논의를 한 것 등은 향후 한반도 주변 4강 사이의 세력균형 변화와 그 과정에서의 러시아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또 러시아는 북-일 관계 정상화가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철도(TSR) 연결 사업을 비롯한 동북아지역의 경제협력으로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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