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李대행「엇갈린 인연」]중정부장―기자로 첫만남

  • 입력 1999년 7월 13일 03시 10분


‘가까이 하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

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신임 총재권한대행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지난 30여년동안 같은 배를 탄 시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편치않은’ 관계였다.

다소 직선적인데다 할 말을 참지 못하는 이대행, 그리고 말을 극도로 아끼며 느긋하게 처신하는 JP…. 이렇듯 스타일부터 두 사람은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5·16쿠데타 직후. 당시 JP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이었고 이대행은 박정희(朴正熙)최고회의의장과 최초로 단독인터뷰에 성공하는 등 맹활약했던 동아일보 정치부기자. 이대행은 JP가 공화당 사전조직사건 등으로 첫 외유를 떠나자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이라는 묘한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대행은 63년, 6대 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64년 6·3사태가 일어나자 초선인 이대행은 당의장인 JP에게 “일보 후퇴하라”고 권고, JP의 당직사퇴와 2차외유를 불러일으켰다.

3선개헌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초 두 사람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JP는 박대통령과의 독대 이후 개헌 쪽으로 선회했고 이대행은 3선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이후락(李厚洛)청와대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제안, 풍파를 겪기도 했다.

79년 10·26사태 이후 두 사람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JP가 공화당총재로 취임하자 이대행은 “떳떳하게 직선으로 대통령에 출마하라”며 ‘체육관선거’에 반대했다. 이후 신군부의 등장으로 JP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긴 방랑생활에 들어갔고 이대행은 구 공화당과의 ‘승계와 단절’을 기치로 한국국민당을 창당, 야당총재로 나선다.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87년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였다. 국민당의원 6명이 공화당으로 옮겨가고 다음해 총선에서 이대행도 낙선하면서 국민당이 공중분해된 것. 이대행은 뒷날 “외국에 나가있다가 남들이 피를 흘려가며 민주화를 쟁취하니까 그제서야 미국에서 돌아와 대선출마를 한 것”이라고 JP를 비판했다.

92년 14대 총선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민자당 전국구에 이대행을 배정하자 JP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민자당을 탈당한 JP가 자민련을 창당, 15대 총선에서 대구 경북지역에 바람을 일으키자 이대행은 직접 ‘JP 공격수’로 나서기도 했다.

이대행은 “여당대표 시절 대통령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던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큰 소리냐”며 JP를 공개 비난했고, JP는 “고약한 사람”이라고 응수했다.

이대행에 대한 JP의 묵은 감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한 장면. 97년12월18일 밤 대통령선거 승리를 자축하며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JP는 국민신당총재였던 이대행이 TV화면에 비치자 “저 사람, 당 옮기느라 배지도 떨어졌지. 더이상 얼굴 안보게 돼 다행이군”이라고 비아냥댔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