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속앓이]『DJ 「색깔」에 또 발목잡히나』

  • 입력 1997년 8월 21일 20시 32분


천도교교령과 국민회의 고문을 지낸 吳益濟(오익제)씨의 월북사건에 이어 金大中(김대중)총재의 비서 출신인 李錫玄(이석현)의원의 「남조선명함사건」까지 터지면서 김총재가 다시 「색깔론」의 중심에 서게 됐다. 국민회의측은 여권의 공세에 대해 신한국당 姜三載(강삼재)사무총장 등 고위당직자를 고발키로 하고 「기획입북」 의혹을 제기하는 등 강력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총재도 『이제는 용공조작이 국민에게 통하지 않는다』며 최근 일련의 사건을 「용공조작」이란 말로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하필이면 왜 김대중총재 주변에서 계속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실제 김총재 주변인물들이 「공안사건」의 주인공이 된 사례는 적지 않다. 지난 88년에는 김총재가 총재로 있던 평민당의 徐敬元(서경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했다. 또 이듬해 3월에는 김총재와 각별한 사이인 文益煥(문익환)목사가 밀입북하는 사건이 터졌다. 95년에는 국민회의 당무위원인 許仁會(허인회)씨가 부여남파간첩인 김동식과 접촉한 혐의를 받아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는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중이다. 그러다가 이번엔 대선을 앞두고 전 당고문인 오씨가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한마디로 「용공조작」이라며 간단히 넘어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김총재가 아무리 해명을 하더라도 좀처럼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73년 미국과 일본에서 이른바 「한국민주회복통일추진본부(한민통)」을 조직했는데 한민통을 조총련이 조종했다는 의혹에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있다. 14대 대통령선거전이 한창이던 92년 10월에는 간첩 李善實(이선실)사건이 터져 김총재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김일성이 이선실에게 난수표를 세차례 보내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도록 활동하라고 지시했다」는 안기부의 발표가 있었으나 안기부가 난수표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김총재는 당시 『설령 북한의 지시가 사실이라고 해도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이를 「안기부의 용공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김총재의 해방을 전후한 활동도 의혹을 사는 원인이 되고 있다. 김총재는 해방직후 呂運亨(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신민당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김총재는 『당시 이들 단체에 가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결별했다』고 해명하고 있으나 이 역시 선거 때마다 「사상문제」로 거론돼 김총재를 괴롭혀 왔다. 김총재가 주변인물들의 월북 밀입북 등으로 시달리게 된 것은 그가 반독재투쟁의 길을 걸어온 전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그의 과거 경력은 한편으로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재야인사, 나아가 친북인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그동안 독재정권의 김총재에 대한 「용공조작」도 계속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얼마전 월간지 보도를 통해 폭로된 신군부의 용공음해조작 문건에서도 입증된다.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오씨월북사건 등이 돌발하고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데 대해 『김총재의 인적자원관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오씨 월북사건이 터지자 『차제에 영입인사에 대한 사전검증 작업을 체계화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뒤늦은 반성도 나오고 있다. 〈최영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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