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통장-휴대전화 없는 3無의 삶 살며 ‘학생 3武 실천’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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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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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전원 4년제 대학 진학 전남 장성고 설립자 반상진 씨

수십 년 동안 무의촌 무료의료봉사를 하고 농촌지역 후학 양성을 위해 전남 장성고 등을 설립한 광주 충장로1가 반이비인후과 반상진 원장.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수십 년 동안 무의촌 무료의료봉사를 하고 농촌지역 후학 양성을 위해 전남 장성고 등을 설립한 광주 충장로1가 반이비인후과 반상진 원장.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남 장성고는 대학 입시를 앞둔 중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꼽히는 ‘전국구’ 명문고로 이름이 높다. 이 같은 명성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 있는 ‘입학 궁금증’ 질문과 각 언론 보도를 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소개된 장성고에 대한 보도 내용 중 일부다.

▶본보 3월 31일자 A20면 참조
[2011학년도 수능성적 분석]16개 시도 제주 ‘평균’ 2년연속 최고


#전남 장성군은 모든 영역의 점수가 전국 시군구 가운데 1위였다. 언어 116.5점, 수리‘가’ 113.9점, 수리‘나’ 125.1점, 외국어 119.6점. 장성군에는 고등학교가 4개 있지만 3곳은 특성화고라서 평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장성고 한 곳(271명 응시)만의 성적이 전국 1위를 이끌어낸 셈이다. 수능 성적을 공개한 2005년부터 장성고의 점수는 계속 상위 20위에 들었다. 이번에는 언어(35.8%)와 수리‘나’(43.3%)의 1·2등급 비율도 시군구 중 1위였다. 학생의 78%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수준별 맞춤학습을 한다. 영어와 수학은 3단계로 나눈다. 1, 2학년 중 영어와 수학 성적이 낮은 30명씩과 우수한 25명씩을 선발해 집중이수반도 운영한다. 교사실명제에 따라 교사가 단원별로 개설한 수업을 선택할 수 있다. 공부뿐만 아니라 포켓볼 골프 검도 영어연극 등 특기적성 교육도 29가지를 마련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장성고는 2011학년도에 서울대 2명, 고려대 및 연세대 25명 등 모든 졸업생을 4년제 대학에 보냈다.

이 같은 장성고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뜻밖에도 ‘장성고 신화’의 배경에는 인근 광주 충장로에서 ‘반이비인후과의원’을 운영하는 노의사 반상진 원장(79)이 있었다. 반 원장은 장성고 설립자다.

17일 오후 그의 병원에서 만난 반 원장은 팔순인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진료실 한쪽에 자리한 원장실은 한 평도 안 될 정도로 좁고 소탈했고, 낡은 탁자에는 철학에세이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책을 집으면서 “나이가 들수록 철학책이 재미있어진다”고 웃으며 말했다.

반 원장 주변 인사들은 그를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내 최장 기간(15년), 최대 인원(20만 명) 무료의료봉사 기록을 갖고 있고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광주시의사회장을 지내며 시민군을 치료했다.

―1966년 충장로에 병원을 열고 45년이 지났는데 요즘도 환자가 많습니까.

“오전 8시 반에 병원 문을 여는데 보통 10여 명이 미리 와 있습니다. 장남(영수 씨·49)과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 환자를 보는데 수요일은 10시간 반, 다른 날은 8시간 반 일합니다.”

―올해 팔순이신데 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매일 오전 7시 집을 나서 충장로 아래쪽 광주일고까지 산책을 다녀옵니다. 보통 40분 걸립니다. 점심은 병원을 나서 밥과 국 한 그릇, 반찬 한 가지 나오는 대인시장의 한 백반집에서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며 먹습니다. 젊었을 때는 설날 추석날 오전 성묘 갈 때를 빼고는 일년 내내 24시간 병원 문을 닫는 일이 없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일요일마다 고창과 장성에서 무료의료봉사에 나섰지요. 폭설이 내려 돌아온 일을 빼고는 15년을 이어 왔지요. 요즘은 일요일이면 아침 일찍 광주 운암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장성에서 내려 산길을 3, 4시간 걸어 고창으로 넘어갑니다. 30년 넘은 우리 부부의 일상입니다. 전북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이 방장산 축령산 모두 유명한 산들입니다. 고창 장성 일대는 조그만 나무꾼 길까지 모두 손바닥처럼 꿰고 있지요. 자연을 벗 삼아 땀 흘려 산길을 걷다 보면 일상의 번민들이 모두 날아가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장성에 가시면 당연히 장성고에도 들르시겠군요.

“가끔 장성고 뒷산을 거쳐 고창으로 넘어가는 코스를 택할 때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부부가 손을 잡고 먼발치에서 학교를 바라보고만 지나갑니다.”

―학교에 따로 사무실이 있나요.

“병원에서 일하기도 바쁜데 굳이 학교에 사무실을 둘 필요가 없지요. 1974년 고창남중학교를 인수한 데 이어 10년 후 장성고를 설립했는데 학교 일은 모두 선생님들이 결정하고 알아서 하도록 했습니다. 학교에는 입학식과 졸업식 때만 갑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지원하면 되는 것이지요. ‘무간섭’이 원칙이라면 원칙이지요.”

―‘간섭하지 않고 지원한다’ 원칙을 현장에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요.

“학교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최선의 여건과 환경을 갖춰주는 것입니다. 저는 학창시절 60리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면서도 단어장을 들고 외우고 예습 복습했습니다만 고창남중 인수 직후 학생들이 집과 학교를 오가는 시간을 줄여 공부에 전념하도록 공동기숙사를 지었지요. 그때 시골에서는 드물게 통학버스를 운행했고, 선생님들도 출퇴근시간을 줄이도록 사택을 지었고, 늘 학생들과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극대화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학운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병원 문을 연 지 얼마 안돼 고창의 몇몇 어르신이 한 사립중학교 인수를 부탁하러 오셨어요. 그때 아버님께 상의 드렸는데 매우 기뻐하는 표정으로 후학들을 키워보자는 뜻을 보이셨지요. 그래서 선친의 호 ‘송파(松坡)’를 따 ‘송파학원’으로 이름 붙인 것입니다.”

―장성고 설립 때도 지역 유지들의 간청에 따랐다는데….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학문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이란 말이 있을 만큼 문향으로 이름 난 장성인데 당시 공사립 학교를 막론하고 인문계고 한 곳이 없었어요. 1983년 장성지역 주민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제가 나서게 된 것이지요. 그 대신 땅을 살 때부터 모든 것을 주민대표들이 알아서 하도록 했습니다.”

―장성고는 ‘3무(三無)’로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모든 시간과 정열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먼저 휴대전화를 없애자고 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없애는 건 당연하고요. 대부분 기숙사에 자녀를 맡겨 놓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학부모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만 학교에 전화를 걸어 연결해 주거나 공중전화를 많이 설치해 갈증을 풀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워낙 널리 알려져 학생 학부모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휴대전화를 안 쓰십니까.

“저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휴대전화를 안 갖고 다닙니다. 일요일 산행 때는 할머니가 갖고 다니지요. 또 학생들에게는 휴대전화 못쓰게 하면서 제가 들고 다닌다면 좀 이치에 맞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학생들과는 다른 차원의 ‘3무’를 스스로 실천하고 계신 거네요.

“일요일 점심 때 산행을 거쳐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고향마을에 도착하면 몇몇 친구들을 만나 소주 또는 막걸리를 마십니다.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옛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큰 낙이지요. 자동차도 갖고 있지 않고 제 이름으로 된 은행계좌도 없습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그게 저의 ‘3무’입니다. 저 대신 병원과 학교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할머니가 큰 고생이지요.”

―스스로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교육의 목적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사회를 실현하는 데 적합하고 유능한 인재를 길러 내는 데 있습니다. 유능한 인재란 주어진 현실에 대한 현명한 적응능력을 키우고, 더 만족스럽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부닥치는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능력과 태도를 길러 주는 일이야말로 학교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겠지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의사회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 병의원들에게 모두 문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나서 ‘시민들이 병나면 어디로 가느냐’고 설득해 문을 열도록 했지요. 저는 의사회원들에게 ‘평소보다 더 착실하게 병원을 지키고, 특히 부상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록해 보관하고 모두 무료로 치료해 드려라’고 전달했습니다. 또한 의사회가 나서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오늘의 비극적인 사태를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 다친 사람들은 모두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시민들이 죄를 지었다면 재판에 따라 처벌받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종교단체들도 의사 표명을 미루고 있는 마당에 의사회가 이런 회견을 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병원 위치가 당시 항쟁중심지였던 옛 전남도청으로부터 100여 m에 불과한데 이 부근은 거의 전쟁터 아니었습니까.

“날짜에 따라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만 아무리 아파도 병원조차 마음 놓고 찾아올 수 없을 만큼 피를 말리는 긴장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제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을 응급처치하고 큰 병원으로 보내는 일이 허다했죠. 제가 의사 가운을 입고 직접 환자를 오토바이와 트럭에 태워 옮긴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5·18 당시 두 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한 번은 병원 앞에서 계엄군에게 심하게 폭행당하고 있는 대학생에 대해 ‘어제 내 병원에 왔던 환자인데 오늘도 꼭 치료받아야 한다’고 거짓말해 병원으로 데려와 몰래 피신시킨 일이 있었지요. 또 한 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본대에서 낙오된 공수부대원 한 명이 젊은이들에게 이끌려 병원에 찾아온 것입니다. 순간 그를 치료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하게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수술실로 데려가 치료를 마친 뒤 집 안방에 숨기고 바깥의 성난 군중에게는 ‘잠깐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흘을 함께 보낸 뒤 내 모자와 옷, 신발로 갈아입혀 병원 직원을 친구처럼 동행해 상무대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돌아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수필가로 등단해 22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

“글재주는 없지만 선생님들과 뚜렷한 주제를 잡아 토론을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걸 하나둘 정리하다 보니 팸플릿 형태의 소책자를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내게 됐습니다. 요즘도 병원 일을 마치면 책을 읽고 메모하는 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 반상진 원장은::

―1932년 전남 장성 출생
―장성중 고창고 졸업
―전남대 의대 졸업
―1966년 반이비인후과의원 개원
―1974년 고창남중학교(송파학원) 인수
―1984년 장성고(〃) 설립
―전남대 의대 외래교수, 광주시의사회장, 전남도의사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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