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천주님이 맡기신 눈 혹사해서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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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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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안구 기증서 서명했던 김수환 추기경

■ 안구적출 집도 주천기 교수의 회고

1990년 안구기증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0년 안구기증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동아일보 자료 사진
“죄스럽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주천기 가톨릭대 교수(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가 추기경을 진찰하고 나서 “눈을 너무 혹사하셨습니다. 소중하신 분이니 더욱 건강에 조심하셔야지요”라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죄스럽다고 한 이유에 대해 김 추기경은 “이 눈도 다 천주님께서 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 잠시 제게 맡겨두신 것인데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기 몇 해 전 있었던 일화다. 2009년 2월 16일 선종한 김 추기경의 안구적출 수술을 집도했던 주 교수가 곧 출판사 amStory를 통해 출간할 책 ‘세상을 보여줄게’에서 추기경의 안구 기증 막전막후를 소개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병원에 올 때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예약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순서를 기다리다가 다른 환자들이 “추기경님과 닮았다”고 말하면 본인이 아닌 척 대화를 나눌 정도로 유머가 많았다고 주 교수는 전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이 임박했을 때 가톨릭계 내부에서 안구 기증에 대해 찬반이 나뉘었던 사실도 소개했다. 김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 안구 기증 동의서에 서명했지만 동의서를 찾지 못하자 논란이 일었던 것. 기증서에 서명하는 추기경의 사진이 발견되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수술 당시 상황에 대해 주 교수는 “안구 적출 과정에선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추기경님의 안구는 전혀 출혈 없이 깨끗한 상태로 적출됐다. 미리 준비한 의안을 넣은 후 경건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눈을 다시 감겨드렸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의 시신이 서울 명동성당에 안치된 첫날 주 교수는 가톨릭교구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안구가 움푹 들어가 생전 모습과 차이가 있으니 보완해 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이었다. 주 교수는 보형물을 의안 아래 넣을까 고려했지만 포기했다. 보형물을 넣었다가 눈꺼풀이 조금이라도 벌어진다면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주 교수는 “만일 추모객이 추기경님이 눈을 뜨신 것으로 오해해 ‘추기경님이 부활했다’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의 로비에 걸린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김 추기경의 휘호에 얽힌 이야기도 주 교수는 소개했다. 1990년경 당시 안과 과장이던 김재호 교수가 방배성당 건립 바자회에 내놓을 목적으로 휘호를 부탁하자 김 추기경은 ‘붓글씨를 써본 적 없다’며 거절하다 결국 한 장을 썼다. 이 휘호는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김 교수가 구입했다. 주 교수는 김 추기경 안구 적출 이후 이 휘호를 기억했고, 김 교수로부터 휘호를 받아 안센터 로비에 걸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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