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주천기 가톨릭대 교수(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가 추기경을 진찰하고 나서 “눈을 너무 혹사하셨습니다. 소중하신 분이니 더욱 건강에 조심하셔야지요”라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죄스럽다고 한 이유에 대해 김 추기경은 “이 눈도 다 천주님께서 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 잠시 제게 맡겨두신 것인데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기 몇 해 전 있었던 일화다. 2009년 2월 16일 선종한 김 추기경의 안구적출 수술을 집도했던 주 교수가 곧 출판사 amStory를 통해 출간할 책 ‘세상을 보여줄게’에서 추기경의 안구 기증 막전막후를 소개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병원에 올 때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예약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순서를 기다리다가 다른 환자들이 “추기경님과 닮았다”고 말하면 본인이 아닌 척 대화를 나눌 정도로 유머가 많았다고 주 교수는 전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이 임박했을 때 가톨릭계 내부에서 안구 기증에 대해 찬반이 나뉘었던 사실도 소개했다. 김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 안구 기증 동의서에 서명했지만 동의서를 찾지 못하자 논란이 일었던 것. 기증서에 서명하는 추기경의 사진이 발견되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수술 당시 상황에 대해 주 교수는 “안구 적출 과정에선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추기경님의 안구는 전혀 출혈 없이 깨끗한 상태로 적출됐다. 미리 준비한 의안을 넣은 후 경건한 마음으로 추기경님의 눈을 다시 감겨드렸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의 시신이 서울 명동성당에 안치된 첫날 주 교수는 가톨릭교구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안구가 움푹 들어가 생전 모습과 차이가 있으니 보완해 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이었다. 주 교수는 보형물을 의안 아래 넣을까 고려했지만 포기했다. 보형물을 넣었다가 눈꺼풀이 조금이라도 벌어진다면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주 교수는 “만일 추모객이 추기경님이 눈을 뜨신 것으로 오해해 ‘추기경님이 부활했다’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의 로비에 걸린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김 추기경의 휘호에 얽힌 이야기도 주 교수는 소개했다. 1990년경 당시 안과 과장이던 김재호 교수가 방배성당 건립 바자회에 내놓을 목적으로 휘호를 부탁하자 김 추기경은 ‘붓글씨를 써본 적 없다’며 거절하다 결국 한 장을 썼다. 이 휘호는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김 교수가 구입했다. 주 교수는 김 추기경 안구 적출 이후 이 휘호를 기억했고, 김 교수로부터 휘호를 받아 안센터 로비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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