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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1950년 장진호전투 미군 통역병 재미변호사 이종연 씨

입력 2010-03-29 03:00업데이트 2010-11-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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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상 높아지며 미국내 6·25참전용사 대접도 달라져”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던 이종연 변호사는 홀로 피란길에 나섰다가 통역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인생이 바뀐다. 한때 전쟁 경험이 준 허무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그는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기적 덕분에 자신의 삶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제는 성공한 한인 1세대로 자리 잡은 그의 뒤로 6·25전쟁 때와 종전 후 미 국무부 등으로부터 받은 훈장들이 보인다. 용인=서영수 전문기자
한국의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은 트로트 곡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6·25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흥남부두는 1950년 12월 미군 등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함께 배에 태우고 남으로 떠난 역사적인 장소. ‘흥남 철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그 유명한 ‘장진호(長津湖) 전투’가 있다. 당시 미 해병대 1만여 명은 흥남에서 가까운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1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사망 2500명, 실종 200여 명이라는 희생을 치르고 5000여 부상자와 피란민들까지 이끌고 흥남을 통해 철수하는 데 성공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전사(戰史)에 남는 겨울 전투로 불릴 만큼 치열했던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진을 빼 향후 6·25전쟁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데 공헌했다. 미국 대통령이 수여한 무공훈장만 17개가 나온 혈투였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설다.

이종연 재미 변호사(82)는 장진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혹한과 눈보라 속에서 2주간 적들과 싸우다 전사한 미군 전우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고교 국어교사를 꿈꾸던 평범한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고려대 국문과 2학년 재학 시절 자원입대해 대위로 전역했다. 이제는 성공한 한인 1세대가 되어 미국과 한국을 오가고 있는 그는 요즘 ‘장진호 전투’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 집에서 그를 만났다.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본래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는데(1928년) 서울로 유학 왔다. 6·25전쟁이 나자 인민군에게 잡혀갈까 두려웠던 가족들이 우선 나만이라도 피란을 가라고 한 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살길이 막막해 피란길에 미8군에서 통역병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다.”

―장진호전투는 본래 작전 자체가 무리였다는 지적이 있다.

“개전 이후 두 달 이상 인민군에게 쫓기기만 하던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자신감에 차 있었다. 10월 1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즉시 항복하라’는 최후통첩까지 보낼 정도였다. 북진하면서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첩보가 있었지만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 소장이나 미 해병 1사단 에드워드 알먼드 10군단장은 중공군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며 계속 전진 명령을 내렸다. 황초령과 부전고원을 거쳐 장진을 통과해 험준한 낭림산맥을 넘는 190km 행군이었다.”

첫 번째로 희생된 부대는 미 7연대였다. 행군 도중 새떼같이 날아오는 중공군 수류탄 세례에 3000여 병력 중 50명이 죽고 200여 명이 다쳤다. 이후 곳곳에 매복해 있다 출몰하는 중공군의 공격에 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침낭에서 자다 그대로 끌려간 병사도 있었고 급히 퇴각하느라 눈 속에 파묻고 온 시신도 많았다.

이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1사단을 이끌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을 떠올렸다. 점점 ‘덫에 걸렸다’는 확신을 갖게 된 스미스 사단장이 그나마 지연작전을 편 덕분에 피해를 줄이고 성공적인 후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찰력과 전세 분석이 뛰어났던 그는 부하를 지키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던 덕장(德將)이었다고 한다. 스미스 사단장은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을 남겨두고 야전 활주로까지 닦아 뒀을 정도로 치밀했다.

―미 해병대는 미군 중에서도 강하기로 유명한 부대 아닌가.

“그렇다. 자부심도 대단하고 전투력도 강하다. 무엇보다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동료가 죽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전우들의 얼굴이 지나가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날아오는 수류탄에 맞서 ‘해병답게 죽자’고 외치며 목숨을 던진 군인이 많았다”며 “그중에서도 소대장이던 리 중위야말로 영웅”이라고 덧붙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리 중위는 총알이 왼발을 관통해 야전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몰래 병원을 탈출해 다시 전장(戰場)으로 돌아와 밤마다 적진을 뒤지며 부하들 시신을 찾아다니다 결국 전사했다.

중공군도 중공군이었지만 무엇보다 미군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추위. 동상 환자만 7000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소변을 보면 그대로 나무막대처럼 얼어붙었다. 모르핀도 얼어붙어 부상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컵에 손이 쩍쩍 달라붙어 물도 마실 수가 없었다. 시레이션만 먹다 보니 모두 설사에 시달렸다.”

이 변호사는 “극한상황에서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챙긴 사람들을 경험한 덕분에 전후(戰後) 힘든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다”며 “당시 우리들을 이끌었던 힘은 민주주의니, 정의니 하는 가치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자체였다”고 전했다.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쟁기계로 취급당하는 모습을 보고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체험했다.

“중공군은 그야말로 인해전술이었다. 병사가 쓰러지면 다시 새 병사들이 파도가 밀려오듯 돌격했다. 하지만 오합지졸이었다. 군복이라야 솜으로 누빈 카키색 코트와 바지, 천운동화에 귀마개 털모자가 고작이었다. 배낭에 든 것도 80∼100발의 탄약, 수류탄, 조리된 쌀, 옥수수, 콩 같은 사오일 치 식량이 전부였다. 통신 수단도 나팔, 뿔피리, 호루라기 같은 것이었다.”

이 변호사는 “손발이 얼고 기아에 못 견뎌 투항하는 중공군도 있었다”며 “인간의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중공군 지휘부에 분노했다”고 회고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25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2만5000여 명이 부상했다.

―미국 사람들에게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데….

“그런 측면이 있다. 6·25전쟁을 기록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자신의 책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에서 지적했듯 미국인들에게 6·25는 제2차 세계대전처럼 어떤 일치된 목표를 세우고 참전한 애국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름도 모르는 이역만리에서 벌어진 어정쩡한 충돌에 당혹스러워했다. 지휘관들은 2차 대전에서 살아남은 노장들이었지만 일반 군인들은 예비군에 편입되어 생업에 종사하다가 느닷없이 소집된 경우가 많았다. 전의(戰意)도 높지 않은 상황에서 타국에 떨어져 오로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3주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국엔 3년이라는 시간을 희망도 없이 버텨야 했다.”

그는 “베트남전쟁과 달리 6·25는 미국에서 텔레비전 뉴스가 발달하기 전에 발발해 당시 미국 사람들도 어떤 나라에서 무슨 전쟁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다. 그러다보니 6·25 참전 군인들은 귀국 후 주변 사람들이 ‘한국’ 자체를 몰라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전했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회(초신 퓨·Chosin Few)’가 만들어진 것도 전후 30여 년이 지난 1983년. 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는 5만분의 1 지도도 없던 시절이라 장진이라는 지역 이름조차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초신(chosin)’을 그대로 따라 썼다. ‘퓨(Few)’는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미국에서 6·25 참전용사에 대한 사회적 대접이 달라진 것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부터.

“한국이라는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참전 군인들의 위상도 함께 올라간 거다. 너도 나도 참전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참전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이제 대다수 미국인은 6·25가 자유주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피와 목숨을 나눈 전투 경험을 공유한 나라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로서는 한미관계의 큰 자산을 갖게 된 셈이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만 60주년이 되는 해다.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이다. 자기가 태어난 해로 다시 돌아온다는 환갑은 지난 삶을 치유하고 남은 생을 잘 마무리한다는 희망적인 뜻이 함께 담겨 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주고 싶은 6·25전쟁의 의미를 ‘감사와 교훈’이라고 말했다.

“이념으로 찢어진 참혹한 전쟁이라고 기억하는 단계는 지났다. 희생자들을 위한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 안의 상처를 치유하는 해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약해지면 언제 어느 때라도 겪을 수 있다는 오늘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 더구나 요즘엔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투가 아니라 테러가 출몰하는 게릴라전이 대세다. 이제 살 만하다고 정신적 긴장을 늦추는 순간, 언제라도 또 다른 6·25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미군 1만 명 VS 중공군 12만 명
할리우드서 1200억대 영화제작

■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29일 미국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소속 군인들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북한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모습. 사진 출처 올리브드랩 사진 컬렉션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일부가 장진호 지역에 진격했다가 중공군 12만 명에게 포위되어 전멸 위기까지 갔으나 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흥남부두에서 철수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됐다.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발을 묶어 함경도 지방으로 진출한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들이 철수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후 38선을 넘는 중공군의 전투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애국심을 거론하며 이 전투를 언급했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2004년 12월 진주만 피습 63주년 기념일에 미 해병대를 치하하며 참전군인들의 용맹을 치하했다.

현재 1억 달러(약 12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할리우드에서 ‘17일간의 겨울(17 Days of Winter)’이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입체 영화로 제작 중이며, 미 해병대 대위도 ‘초신’이라는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다. 국내에는 소설 ‘얼어붙은 장진호’(고정일)가 있으며 참전군인 마틴 러스가 쓴 ‘브레이크 아웃’(부제 1950 겨울, 장진호전투)이 번역되어 있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가장 추웠던 겨울’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종연 변호사:

그는 1953년 경기 문산 부근에서 휴전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8개월간 교관생활을 하다 1954년 9월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갔다. 학부와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미 국방부와 법무부, 주한 미8군 고문변호사로도 일했다. 서울대 고려대 사법연수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 최고인민검찰원에서 미국 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미국 내 저명한 변호사 명부인 마틴 델 허벨 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인천국제공항법률고문(1999∼2003년)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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