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웃잖아… 청춘들, 얼굴 펴”

  • 입력 2009년 5월 25일 03시 05분


말기 암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열정적인 강의와 멋진 패션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차태훈 교수. 22일 학교 강의실에서 만난 그는 “베레모와 안 어울려 귀고리를 하지 않았다”며 밝게 웃었다. 홍진환 기자
말기 암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열정적인 강의와 멋진 패션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차태훈 교수. 22일 학교 강의실에서 만난 그는 “베레모와 안 어울려 귀고리를 하지 않았다”며 밝게 웃었다. 홍진환 기자
말기암 한국외대 차태훈 교수, 시한부 선고 딛고 ‘희망’ 강의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차태훈 교수(45)는 종종 귀고리를 하고 강단에 선다. 젊은 학생들 사이에선 ‘멋쟁이’ 교수님으로 통한다.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즐겨 쓴다는 비니모자에 목걸이까지 하고 나오는 날엔 “마케팅 전공 교수라 역시 다르다”는 평도 듣는다.

그의 남다른 패션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다. 1년 넘게 받아 온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자 그는 올해 초 삭발을 했다. 그날 차 교수는 비니모자 5장을 샀다. 모자로 가려도 드러나는 까맣게 변한 얼굴. 그 허전함을 귀고리와 목걸이로 달랬다.

차 교수가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은 2007년 9월. 수술대에 올랐으나 암세포가 너무 퍼져 있어 제대로 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주치의는 항암치료를 시작하며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1년 반째 삶의 의지를 지켜내고 있다.

22일 교내 연구실에서 만난 차 교수는 소문대로 멋쟁이였다. 그러나 오랜 투병생활로 야윈 탓에 재킷의 어깨는 처져 있었고 바지 허리춤은 몇 겹이 겹쳐 있었다. 4년 전 졸업식에서 제자들과 찍은 사진 속 차 교수는 지금보다 하얗고 통통했지만 그때의 서글서글한 미소는 이날도 여전했다.

차 교수의 강의는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리포트와 팀 프로젝트 과제가 많고 매주 퀴즈시험을 치러야 한다. 마감을 연장해 준다거나 출석 점검을 거르는 일은 결코 없다. “‘뺑뺑이’를 세게 돌려야 제자들이 기업에 필요한 인재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차 교수는 10년째 계속해온 리포트·시험지 첨삭지도 등으로 학내 강의평가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항암치료로 몸이 쇠약해지면서 강의 대신 연구비중을 늘리다 보니 차 교수는 연구실에서 옛 제자들을 많이 만난다. 취업 걱정을 털어놓는 제자들에게 그는 “이놈아, 너랑 나랑 누가 더 한심하냐”고 되묻는다. 그러곤 “나도 이렇게 잘 사는데, 왜 네 얼굴이 나보다 슬퍼 보이냐”고 쏘아붙인다.

그도 위암의 시련 앞에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 진단을 받고 병원 문을 나설 때 “고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 시집보낼 때까지는 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보름간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먹고 자고 산책만 했다.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하루에 열 끼니라도 먹고 열 시간이라도 달리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내가 하던 일,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고 생각하니 힘이 났어요.”

차 교수는 그렇게 다시 강단에 섰다. 올 초엔 한국외국어대 글로벌경영대 출범식 무대감독까지 맡아 축하동영상에 출연해줄 유명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3개월간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의 내가 떠올라 괴롭고, 몇 년 뒤를 내다보는 일도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겐 오로지 ‘지금’뿐이다. 시한부 선고일을 넘긴 뒤로 차 교수는 그날그날 연구에 충실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광고에 대한 비교문화적 접근’이란 논문으로 4월 한국광고학회 우수논문상을 받기도 했다.

차 교수는 요즘 1, 2학년생들에게 ‘진로설계세미나’란 과목을 가르친다. 그는 “인생이 꼭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란 말을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지나고 보면 최악이 아니란 깨달음도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암 진행 정도가 예상보다 심해 수술을 중단했을 때는 나락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껏 덤으로 잘 살고 있잖아요.”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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