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물리학에서 좌표축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기준이 되는 원점이 있다. 우리는 이 원점에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내가 서 있던 원점이 심하게 흔들렸다.
프랑스에 있는 친구 제랄 교수에게 폭염이 걱정돼 메일로 안부를 물었다. 며칠 후 답장이 도착했다. “정말 덥네. 올여름 내내 후두암 치료를 받으려고 해. 7∼8월에는 항암 치료, 9월에는 X선 치료를 받을 예정이야. 내 집에는 언제든 환영해. 부디 부담 없이 와. 나 보고 싶지?” 제랄은 오랫동안 함께 연구하기도 했고,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다.
인터넷으로 후두암을 알아봤다. 고통스러운 병이었다. 암이라든지 죽음은 언제나 타인을 통해 먼저 인식된다. 나와는 상관없이 멀리 있던 존재가 가슴속으로 훅 들어온다.
내가 아버지를 우주로 보내드린 것은 50대 중반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가 살아온 삶의 좌표축이 크게 바뀌었다. 위를 향해 있던 축의 원점이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내 좌표축에 죽음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 그 뒤로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를 차례로 떠나보내며 내 좌표축은 더 낮은 곳으로 향하게 됐다.
재작년 건강검진에서 암 소견이 나왔다. 의사는 반반의 가능성이 있다며 정밀검사를 권했다. 하필 해외 출장이 예정돼 있어 검사를 마친 뒤 2주 동안 출장을 다녀와야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느리고 무거운 시간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와 다행히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다 버리고 좌표축을 이동하듯 이사를 결심했다.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더 낮은 곳으로.
고대에는 좌표축이 없었다. 사람들은 점과 선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논리를 만들었다.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별의 위치를 기록하기 위한 좌표축이 생겨났다. 이후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오늘날의 3차원 직교좌표계를 만들었고, 그 토대 위에서 뉴턴의 물리학이 완성됐다. 이 좌표축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간이 포함된 4차원 상대론 좌표축으로 발전했다. 아인슈타인의 좌표축은 ‘사건’이 존재하는 시공간을 말한다. 양자역학의 좌표축은 우주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담긴 상태 공간이다. 양자역학에서 좌표축은 가능한 모든 상태를 모아 놓은 공간을 뜻한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제랄 교수의 답장을 받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답장을 보냈다. “안녕, 제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지난 며칠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지냈어. 그 생각들은 짙은 안개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과 소중한 추억들도 함께하고 있었어. 나는 네가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고 믿어. 우리 모두 건강을 잘 챙기자.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위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는 너희 부부를 위해 정원에 꽃을 심어뒀어.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살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위에서 아래로, 때로는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좌표축을 옮기지만, 최종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곳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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