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조은아]佛 ‘마크롱표’ 연금 개혁의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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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뛰어났지만 사회적 합의 실패
노인 빈곤 1위 韓, 대화에 더 공들여야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올 1월 시작된 프랑스 주요 노동조합의 연금 개혁 반대 총파업이 이번 주로 11번째를 맞는다. 올해 달력을 이미 석 장 넘겼는데 파리에서는 파업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을 정도다. 아이들 학교는 직원들이 파업 중이어서 전화를 잘 받지 않고 어린이집은 수시로 문을 닫는다. 해외 출장을 가려고 비행기표를 예약해도 항공사 직원 파업 때문에 결항돼 일정이 자주 꼬인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도 업무를 중단해 길가에는 쓰레기가 넘쳐 걸어다니기조차 힘들다.

외국인에겐 낯설고 힘겨운 시간이다. 하지만 많은 현지인은 이런 불편에 굴하지 않는 것 같다. 연금을 받게 되는 시점인 법정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늦추는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파업을 몇백 번이라도 반복하겠다는 저항 의지가 거세다. 저항을 넘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이 하늘을 찌른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헌법 49조 3항 특별 규정에 따라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연금 개혁안의 의회 처리를 강행하자 많은 파리 시민들은 콩코르드 광장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콩코르드 광장은 보통 파업을 선언한 노조가 시위를 하러 집결하는 레퓌블리크 광장이나 바스티유 광장보다 의미심장하다. 1793년 절대왕정을 상징하던 루이 16세와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어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이곳에 모임으로써 마크롱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방증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그가 잃은 지지율을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대표 마린 르펜이 쓸어 담고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총선이 있다면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26%는 RN을 택한 반면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르네상스당이 속한 중도 연합 앙상블은 22%만 선택했다.

많은 프랑스 정치 전문가는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마크롱 대통령이 국정 운영 동력을 되찾기 힘들어 보인다고 말한다. 오히려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국정 동력을 더 잃을 수도 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으로 누적된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구가 감소해 경기(景氣)가 침체된 소도시 주민들은 연금 개혁 반대를 명분으로 폭력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프랑스 파업 정국과 사회 혼란은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힘들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재선에 도전할 때부터 공약을 내놓으며 연금 개혁 의지를 꾸준히 강조했다. 대통령이 연금 개혁 중요성을 거듭 환기한 건 좋았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 많은 국민을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올 1월 연금 개혁안을 정식 발표할 때까지 마크롱 대통령이 개혁 방향과 취지를 놓고 국민 이해를 구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발표 이후 마크롱 대통령이 대통령실 엘리제궁에서 여러 노조 대표들과 만났다는 보도는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자주 만났고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가 얼마나 연금 개혁에 진심이고 애쓰는지 반대파들이 수긍할 여지를 주지 않은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 1위이며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 한국이야말로 연금 개혁이 시급하다. 지도자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대화에 더욱 공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연금 개혁을 둘러싼 사회적 혼란이 국가적으로 막중한 각종 현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서 개혁은 또 흐지부지될지 모른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프랑스보다 막대할 수밖에 없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프랑스 연금 개혁#사회적 합의 실패#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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