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50년 흘러도 생생한 헤비급 ‘3색 명승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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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8일 미국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프로복싱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조 프레이저(왼쪽)가 무하마드 알리에게 펀치를 날리고 있다. AP 뉴시스
1971년 3월 8일 미국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프로복싱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조 프레이저(왼쪽)가 무하마드 알리에게 펀치를 날리고 있다. AP 뉴시스
이원홍 전문기자
이원홍 전문기자
‘세기의 대결’로 불렸던 무하마드 알리(1942∼2016)와 조 프레이저(1944∼2011)의 50년 전 대결을 기념한 동상이 세워진 9일 저절로 연상되는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알리와 프레이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복서, 조지 포먼(72·이상 미국)이다. 3명을 등장시켜야만 그들의 인생극장을 제대로 펼쳐 보일 수 있다.

1971년 3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프레이저와 알리의 프로복싱 헤비급 대결에서 챔피언이었던 프레이저가 알리를 15회 다운시키며 판정승했다.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챔피언 벨트를 박탈당한 뒤 3년여 만에 돌아온 상태였다. 흑인 인권과 반전 운동에 앞장섰던 알리는 프레이저를 백인에게 순종하는 흑인을 뜻하는 ‘엉클 톰’으로 부르며 도발했다. 프레이저가 흑인 인권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로 인해 프레이저와 가족들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알리가 박탈당한 챔피언 벨트가 걸린 타이틀 매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알리를 위한 구명 운동까지 했던 프레이저의 분노는 컸다.

프레이저의 앞길은 찬란해 보였다. 그러나 1973년 1월 포먼과의 대결에서 2회 동안 6번 다운당하며 TKO패 했다. 포먼은 다시 1974년 10월 알리에게 8회 KO패 하며 챔피언 벨트를 뺏겼다. 아프리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서 열린 이 경기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정글의 대소동(Rumble in the Jungle)이다. 32세의 노장 알리는 로프에 기대어 포먼의 강펀치를 흘려보내며 지치게 한 뒤 승리했다.

이런 알리에게 프레이저는 다시 도전했다. 1975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경기는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로 불렸다. 눈이 모두 부어오른 프레이저 측이 15회 경기를 포기하며 알리가 승리를 거뒀지만 그 역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프레이저는 1976년 포먼과의 두 번째 대결에서 다시 패하면서 은퇴했다.

지금까지도 이들의 경기는 복싱 사상 가장 위대한 경기로 꼽힌다. 3명 모두 가난한 흑인 소년이었고 모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스타일과 인생 경로는 판이했다. 프레이저는 전형적인 돌진 선수였다. 어릴 때 다친 왼팔이 평생 제대로 펴지지 않았지만 이 왼팔 훅을 주무기로 삼았다. 예비 선수로 참가했다가 주전 선수가 다치는 바람에 대신 출전한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왼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통증을 참고 금메달을 따냈다. 알리, 포먼(이상 키 191cm)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던 프레이저(182cm)였지만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포먼은 둔중하지만 강력한 파워를 앞세웠다. 통산 76승(68KO) 5패를 기록한 그는 프레이저(32승·27KO 1무 4패), 알리(56승·37KO 5패)보다 월등히 높은 KO율을 자랑했다. 알리는 거구이면서도 경쾌한 풋워크를 자랑했고 상대에 따라 아웃복싱과 몰아치기를 적절히 구사하는 지략형이었다.

프레이저가 은퇴 후 복싱을 가르치며 살아간 반면 포먼은 경기 후 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느낀 바 있어 목사가 되었다. 그는 28세에 은퇴했다 38세에 복귀해 45세에 다시 세계챔피언이 되었고 방송인으로도 활동했다. 알리는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복싱 외에도 인권과 반전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스타일은 3인 3색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함께 엮은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리 뜨거웠던 순간들이라도 세월 속에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스토리가 재생된다면 이는 일종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으로 남는다.

알리는 프레이저를 그토록 도발한 데 대해 “경기의 흥행을 위해서였다”며 후일 신문 지면을 통해 사과했다. 하지만 프레이저가 알리와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프레이저의 자녀들은 동상 제막식에서 “아버지는 알리를 사랑했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먼 후일 자녀들이 두 사람을 함께 추모하는 모습 속에서 세월이 지닌 치유의 힘을 느낀다. 그들은 결국 한 무대의 같은 주인공이었다.

이원홍 전문기자 bluesky@donga.com


#알리#프레이저#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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