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과 말[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준형 변호사·작가
박준형 변호사·작가
“정의는 특수촬영 히어로물이나 소년지에만 있는 거라고 생각해.”-일본 드라마 ‘리갈 하이’ 중

드라마 속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는 석가여래도 격분할 독설을 숨 쉬듯 내뱉는 냉혈한이자 매사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는 아웃사이더이다. 어느 날 후배가 ‘선량한 다수의 보편적 정의’를 묻자 그런 건 소년만화에나 있다며 일침을 가하더니 말문이 막힌 후배에게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야.”라고 충고한다. 과연 코미카도 선생은 부도덕과 부정의의 화신으로 비난받아 마땅할까.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세간의 지탄을 받는데, 대개 “어째서 저런 못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느냐”며 부도덕과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 목숨을 예사로 거둬가던 살인마를 변호할 때나 들을 법한 소리 같지만, 평범한 사람 사이 금전관계를 다투는 민사소송에서도 종종 이런 욕을 먹는다. 내가 장수하기를 비는 마음이 다소 거칠게 표현되었구나 싶다가도 돌이켜보면 찜찜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이른바 ‘보편적 정의’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소송전에서 서로가 보편적 정의의 입장에 있다며 상대방의 부정의를 비난하지만 따져보면 지극히 주관적으로 원하는 결론을 정의, 그와 배치되는 결론을 부정의로 규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보편적 정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정의는 진리와 같지 않고 오히려 비탈길을 구르는 동전과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떤 면을 보이느냐에 따라 정의 혹은 부정의가 되고, 종래의 평가를 180도 바꿔놓기도 한다.

소송 당사자 각자의 정의가 이러할진대 그를 돕는 변호사의 정의인들 다를 리 없다. 의뢰인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 그것이 위법이 아닌 한 변호사에게 사슴은 말이 될 수 있다. 변호사가 실체도 불분명한 보편적 정의론에 따라 의뢰인의 정의를 재단한다면 이는 선을 넘은 것이고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이따금씩 날아드는 삿대질을 피해 가며 이렇게 해명하곤 한다. “‘못된 자의 부정의’를 돕는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른 자의 정의’를 돕는다.”

박준형 변호사·작가
#사슴#말#정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