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민들은 또 다른 마크롱을 원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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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지방선거 투표소에서 만난 시민들
“마크롱, 기득권만 돕는다” 성토
EU 체제 속 개별국가 정책 한계 뚜렷… 포퓰리즘 정치인 배출 가능성

프랑스 파리 펠릭스포르 146가에 위치한 투표소에서 한 청년이 마스크를 쓴 채 지방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인근 다른 투표소에서도 유권자들이 줄을 서 입장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프랑스 파리 펠릭스포르 146가에 위치한 투표소에서 한 청년이 마스크를 쓴 채 지방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인근 다른 투표소에서도 유권자들이 줄을 서 입장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김윤종 파리 특파원
김윤종 파리 특파원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오후 5시 파리 15구 한 초등학교 앞. 파리시장을 비롯한 전국 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지방선거가 열리면서 학교마다 투표소가 설치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한꺼번에 투표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선거관리 요원이 투표소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유권자들이 1m 거리를 두고 줄을 섰다. 선거 관리자와 유권자가 직접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플라스틱 칸막이가 곳곳에 설치됐다. 대학생 피에르 씨(26)는 속전속결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집어넣은 후 투표소를 빠져나왔다. 그는 “2017년 대선, 총선 때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3)과 집권여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슈(LREM·전진하는 공화국)를 찍은 열성 지지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화당 후보(라시다 다티 전 법무장관)에게 표를 줬다고 했다.

“더 이상 마크롱 대통령에게 공감하지 못하겠네요. 그는 기득권을 위해 일하는 것 같아요.”

○ ‘새 정치 상징’에서 ‘그 밥에 그 나물’로
피에르 씨처럼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실망은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2017년 5월 임기를 시작한 마크롱의 ‘중간평가’로 불린 이날 선거에서 집권여당은 파리는 물론이고 마르세유, 리옹,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등 주요 도시에서 모두 패배했다.

에펠탑이 있는 7구의 또 다른 투표소에서 만난 에브노 씨(57)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와는 또 다른 이유로 마크롱 대통령을 불신한다고 했다. 그는 “나도 지난 대선에서 마크롱에게 표를 던졌다”며 “그런데 지지부진한 연금개혁을 비롯해 중장년층은 ‘마크롱 정부는 너무 아마추어라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가 만난 10명의 유권자 중 7명은 2017년 대선 당시 마크롱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러나 7명 가운데 6명은 이날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를 뽑지 않았다고 밝혔다.

프랑스 북부 아미앵 출신인 마크롱 대통령은 파리정치대(시앙스포)를 거쳐 2004년 국립행정학교(ENA·에나)를 졸업한 후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에 입사했다.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비서실 근무 2년, 경제장관 2년이란 짧은 경력을 거친 후 만 39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나폴레옹 이후 가장 젊은 프랑스 지도자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선 당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주의’를 표방하며 프랑스 정치권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그가 창당한 LREM은 같은 해 6월 하원 총 577석 중 과반(289석)이 넘는 314석을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 온 공화당(우파)과 사회당(좌파) 양당 구도를 깨고 의회까지 장악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그는 내각 22명 중 11명을 출판사 대표, 스포츠 스타 등 비정치인으로 임명하면서 ‘새 정치의 상징’으로 비쳤다.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마크롱 대통령은 현재 ‘말만 잘하는 정치인’, ‘기존 정치인과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 집권여당 LREM에서는 내부 분열이 계속되면서 5월 하원의원 17명, 7명이 연달아 탈당했다. 의석수가 절반 이하인 281명으로 축소되면서 마크롱 대통령도 타격을 입었다. 집권 초 62%가 넘던 지지율은 노란조끼 시위, 연금개혁 추진과 반대 파업, 코로나19 대응 미흡 등을 거치면서 33%(6월 기준)로 반 토막이 났다.

리더십 자체가 크게 흔들리자 마크롱 대통령이 자진 사퇴를 고려한다는 언론보도까지 나왔다. 일간 르피가로는 지난달 11일 마크롱 대통령이 런던 내 후원자들과의 화상회의에서 사퇴 후 조기 대선을 통해 재신임을 받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엘리제궁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에게는 마크롱 대통령의 현재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마크롱, 비판 의식해 ‘좌클릭’ 강화
마크롱 대통령이 집권 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을 비롯해 연금, 세제, 공무원 개혁을 추진했다. 블룸버그는 “프랑스 경제는 2017년 2.3%, 2018년 1.7% 성장했고, 2019년 실업률은 8.5%로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성과도 있었다”며 “기업 투자도 반등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는 잃었다”고 보도했다.

2018년 말 유류세를 인상하는 반면 부유세나 법인세 축소를 추진하면서 부자와 대기업에만 유리한 정책을 펼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이날 투표에 나선 회사원 쥘리앵 씨(35)는 “중도주의와 혁신을 내세운 3년 전 마크롱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그냥 기득권을 옹호하는 우파 정치인으로 보인다”라며 야당에 투표했다.

비판을 의식한 듯 마크롱 대통령도 정책 기조를 ‘우클릭에서 좌클릭으로’ 변화하려는 중이다. 그는 지난달 29일 파리 엘리제궁 정원에서 ‘시민 기후 협의회’ 회원 150명과 회동을 가진 후 친환경 정책에 150억 유로(약 20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조만간 개각을 단행해 총리 등 정부 요직에 좌파 정치인을 기용할 것이라고 르몽드는 예측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마저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시민이 적지 않았다. 자영업자 파트리크 씨(47)는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친환경을 내세운 녹색당이 대도시에서 승리하니 나온 땜질 대책”이라고 말했다. 공무원이었던 그는 공화당을 오랫동안 지지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혁신을 강조한 마크롱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는데 실망만 커졌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마크롱이 정말 친환경 정책을 추구하려 했다면 초대 환경장관 니콜라 윌로를 내각에서 나가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명 환경운동가란 명성 탓에 스타 각료로 꼽히던 윌로 장관은 “마크롱 정부가 환경정책을 등한시한다”고 비판하며 15개월 만인 2018년 8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유럽 정치 환경 변해야 ‘새 인물’ 정착 가능
여당의 파리시장 후보인 아녜스 뷔쟁 전 보건장관(오른쪽)의 선거 포스터. 뷔쟁 전 장관은 이 날 득표 수에서 3위에 머물렀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여당의 파리시장 후보인 아녜스 뷔쟁 전 보건장관(오른쪽)의 선거 포스터. 뷔쟁 전 장관은 이 날 득표 수에서 3위에 머물렀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지지율 하락은 ‘마크롱이란 인물’ 자체보다는 프랑스, 나아가 유럽의 정치 환경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상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유럽 개별 국가들의 정책 집행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주요 국가들은 1980년대까지 우파는 고용유지와 사회복지, 좌파는 규제완화와 경제성장, 즉 각각 상대방이 주장하는 정책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타협점을 찾았다. 중도우파, 중도좌파의 양당체계가 공존하는 정치문화가 지속된 이유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경제규모에 비해 사회복지가 확대되면서 재정 압박이 커졌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으로 경기 침체가 가속화됐다. 시리아 내전이 초래한 2015년 유럽 난민사태로 극단적 민족주의가 성행하면서 개선되기 어려운 현실을 무시한 채 유권자 감정만 자극하는 극우 혹은 극좌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가 득세하게 됐다. 반면 기존 양대 정당은 힘을 잃었다.

여기에 유럽연합(EU) 단일통화인 유로화 체계가 공고해지면서 각 국가 정부가 개별 정책을 시행해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주기 어렵게 됐다. 중도주의를 내세운 마크롱 대통령 역시 이런 환경 속에서 기존 우파나 좌파에 실망한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었지만 문제 해결 능력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정책만 앞세운 포퓰리즘 정당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유럽 전문가인 조홍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 때문에 언제든 새로운 인물이 급부상해 마치 2017년 마크롱처럼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5월 39%에 그친 반면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50)의 지지율이 46%로 치솟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필리프 총리는 중도우파 공화당 소속으로, 북부 노르망디 항구 르아브르의 시장 겸 국회의원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좌우 인물 모두 중용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2017년 5월 다른 당 소속인 그를 총리에 임명했다.

필리프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과 일곱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정치인치고는 젊은 편이다. 공격적인 말투로 비판을 받는 마크롱과 달리 진중한 말투와 태도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코로나19 사태로 실무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차기 대선주자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환경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새 인물과 정당이 집권해도 정책을 제대로 펴기 어려워 결국 “다 똑같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 집권 하반기에도 마크롱 대통령 지지율이 계속 추락하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는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치인에게 표가 쏠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현지에서 나오는 이유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
#프랑스 지방선거#마크롱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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