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벤처투자사, 또다시 누더기 규제인가[현장에서/곽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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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액셀러레이터가 발굴한 스타트업 미로의 ‘라스트오더’ 서비스. 롯데액셀러레이터 제공
롯데액셀러레이터가 발굴한 스타트업 미로의 ‘라스트오더’ 서비스. 롯데액셀러레이터 제공
곽도영 산업1부 기자
곽도영 산업1부 기자
“롯데 망하게 할 회사를 찾아라.”

2016년 2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사재 50억 원을 내 스타트업 투자사인 롯데액셀러레이터를 세웠다. 앞으로 회사의 미래가 될 만한 기업을 발굴하라는 특명이었다. 실제 롯데마트와 세븐일레븐에서 유통기한 임박 제품 판매 서비스를 성공시킨 스타트업 미로가 롯데액셀러레이터 출신이다. 이른바 기업형 벤처투자사(CVC)의 성과다.

롯데는 2017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지주사 산하에 금융회사를 둘 수 없도록 한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롯데액셀러레이터는 호텔롯데 산하로 옮겨갔다. 마찬가지 사정으로 계열사 밑에 CVC를 둔 사례가 CJ, 코오롱이다. SK와 LG는 아예 미국에 CVC를 두고 있다.

업계는 CVC 규제 완화를 고대해 왔다. CVC가 성공하려면 그룹 총수의 혁신 의지와 장기적인 투자 전략,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가 중요하다. 단기 실적이나 경영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는 특정 계열사보다는 지주사 밑에 있는 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규제 완화를 목전에 두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주사가 CVC를 둘 수 있게 하되, 100% 모회사 자금으로만 운용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겠다는 거다. 현장에선 “또다시 누더기 규제의 시작인가”라는 절망감이 팽배하다.

공정위는 “대기업이 외부 자본으로 무한정 사업을 확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구글이 100% 자기 자본으로 벤처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구글은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다. 자체 전략에 따라 독자적으로 CVC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며 법적인 강제를 받은 것도 아니다. 미국의 수많은 CVC를 비롯한 벤처투자 생태계는 각종 민관기금과 국내외 자금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펀드에 기반한다. 이를 양분으로 성장한 유니콘이 엑시트에 성공하면 다시 그 자금이 시장에 회수돼 다음 유니콘에 기회가 되는 구조다.

국내 CVC들도 이런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롯데의 미로 역시 KDB산업은행의 정책자금이 섞여 있는 펀드의 수혜 기업이다. 투자사가 운용 전략을 짜는 데 그 모회사의 자금만 써야 한다는 한국식 족쇄를 걸어두면 이들이 굳이 역차별을 받으며 지주사 밑으로 들어갈 유인이 없다. 해외에서 CVC를 잘하고 있는 SK, LG 역시 국내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총수가 CVC 지분을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투자 명세를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면서도 ‘대기업이 무한정 사업을 확장하는’ 게 그렇게 두렵다면 차라리 공정거래법을 그대로 두면 될 일이다. 다만 정부 당국이 이 한 가지는 알았으면 한다. 미국에선 벤처투자액의 51%, 일본에선 44%를 CVC가 견인하는 동안 한국은 비중이 9%(2018년 기준)에 그치고 있는 현실 말이다.
 
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
#기업형 벤처투자사#c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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