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통합당이 망한 숨겨진 진짜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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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지력, 커뮤니케이션 기본기 부족
기초 체력 강화 없이 사람만 바꾸면 또 필패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세대교체 실패, 중도 공략 실패, 외연 확장 실패, 막말 통제 실패, 탄핵의 강 넘기 실패….

미래통합당이 4·15총선에서 폭망하자 온갖 곳에서 보수 몰락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대체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위의 진단은 길게는 수년 전부터 나온 것들인데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의 원인이 되는, 보다 근본적인 보수 몰락의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필자는 총선을 지켜보며 최소한 숨겨진 진짜 몰락 이유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보수 진영의 ‘정치 인지적 IQ’에 문제가 있었다.

종종 정치의 세계에선 자신이 사실이라 믿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더 중요할 경우가 있다. 자신은 A라고 알고 있는데, 주변에서 B라고 여기면 사회적으로는 B가 될 수 있다. 보수는 이걸 몰랐다.

차명진 전 의원의 세월호 유가족 관련 막말에 대한 통합당의 대처가 딱 그랬다. 차 전 의원 막말이 8일 알려지자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등 상당수는 선거를 망칠 수 있다며 제명을 요구했지만 황교안 당시 대표와 주변은 머뭇거렸다. 막말 내용 중 일부가 사실일 수도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얘기였다. 차명진 발언의 진위를 따지려면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당은 ‘세월호 막말당’으로 인식돼 총선이 끝날 상황인데도 말이다. 지난해 6월 여성 당원들의 ‘엉덩이 춤’ 논란의 문제도 맥락은 차명진 막말 사건과 유사하다. 통합당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여성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성 비하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황교안은 “좋은 메시지를 내놓으면 하나도 보도가 안 된다. 실수하면 크게 보도가 된다”고 했다. 이렇게 말해 봤자 “한국당이 여성 비하 해놓고 대표는 언론 탓한다”는 인식을 더 굳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팔 할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잘 몰랐다. 동서양을 떠나 선거는 결국 메시지 싸움이다. 박근혜는 ‘경제 민주화’라도 있었고,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압도적인 메시지로 백악관 주인이 됐다. 그런데 통합당이 모든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쏟아내 만든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문재인 심판’이라는, 여권의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는 메시지 외에 보수만의 독창적인 무엇이 없었다. 선거 막판 합류한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조국 살리기냐, 경제 살리기냐’는 메시지를 냈지만, 그 전에 몇 달 동안 통합당의 메시지가 워낙 흐리멍덩해서인지 막판까지 당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위 두 가지에 월등히 강하다.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바닥 민심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몸소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무원 교수 법조인 등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많은 통합당은 경쟁이 안 되는 부문이다.

보수 재건을 위해 3040대 기수론도 나오고 청년 정당 아이디어도 나온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사실이 어떻게 투영되고 어떻게 이에 반응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메시지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과 이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없으면 세대교체도, 외연 확장도 어렵다. 많은 통합당 사람들이 좋아하는 골프로 치면 보수는 클럽을 교체하거나 드라이버 거리를 늘리기 전에 그립과 스탠스 같은 기본부터 고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을 부정하고 이를 처음부터 다지는 건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선 보수에 미래가 없음을 이번 총선은 보여주고 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미래통합당#보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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