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치즈 신부’의 선종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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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벚꽃철이다. 벚꽃 하면 일본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벚나무 중 가장 화려한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제주도다. 그 사실을 처음 밝혀낸 것은 1902년 제주도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에밀 타케 신부다. 그가 일본에 있던 식물학자 친구 신부에게 왕벚나무의 존재를 알리고 그 대가로 온주 밀감 14그루를 선물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주 감귤농업의 기반이 됐다. 프랑스 출신의 공안국(본명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미사주를 만드는 데 쓸 포도를 얻기 위해 1901년 경기도 안성 구포동 성당에 머스캣이라는 외국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후 주민들이 안성의 토질 기후 등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사실을 발견하고 포도를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안성 포도의 출발점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보통 선교를 시작한다.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는 것과 빈곤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은 선교의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선교 이전에 인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동이다.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짓는 것 외에 농축산업 기술을 전파하고 새 작물이나 산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 이유다.

▷전북 임실은 2010년 순천완주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자동차로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1967년 임실 성당에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스테번스) 신부가 부임해 서양에서 산양 2마리를 들여왔다. 처음에는 산양유를 팔았는데 남아 버려지는 산양유의 처리를 고민하다 치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산양유로 만드는 치즈가 향이 강해 시장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 산양유 대신 우유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피자 붐이 일어 치즈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명 브랜드로 성장했다.

▷김치가 어울리는 산골마을의 이국적인 치즈에는 특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지 신부가 산양을 들여올 기발한 결심을 한 것은 가난한 주민들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소박한 일념에서다. 벨기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 그였으나 치즈 만드는 법을 유럽까지 가서 배워오기를 수차례 거듭한 끝에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주민들이 치즈 생산의 혜택을 볼 즈음에 그에게 불치병인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찾아왔으나 굴하지 않고 “장애인이 됐으니 이제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하겠다”며 장애인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가 13일 88세로 선종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신부님, 고마웠습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왕벚나무#임실 치즈#지정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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