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우리에겐 아주 많은 1분이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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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프리랜서인 게 싫었다. 그래서 개인 사업자를 냈다. 하지만 1인 사업자는 프리랜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다 미래 일자리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목차엔 이런 소제목이 있었다. ‘신인류의 새로운 직업, 프리랜서’.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종자가 태어난다. 고령 인구를 대상으로 한 유명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은퇴 후 이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텃밭 가꾸기’였다. 그러나 10대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은퇴해서 텃밭을 가꾸라고 하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의 기준에서 ‘좋은’ 세상은 다음 세대들에게는 지옥일 수 있다.”(책 ‘메이커의 시대’)

평생 한 직장에서 9-6으로 풀타임 근무하는 것. 그것은 우리 세대가 ‘원했지만 얻지 못한 것’인 동시에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온 지옥에 대해 생각했다. 수평적이지 못한 조직문화, 주인의식을 가지기 힘든 노동환경,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일터. 나에게 혼자 일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들로부터는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불안은 자유를 얻은 대가였다.

인간이 회사에 많은 부분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근로 형태는 빠른 시일 내에 바뀌게 될 거라고 미래학자들은 말했다. 기업에 고용돼 월급을 받기보다는, 개개인이 프로젝트별로 계약하는 시스템이 그 예다. 신자유주의의 미래일까?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미리 준비하는 셈 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사업자등록을 한 지 4개월이 지났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다. 첫째는 일을 주는 사람이고, 둘째는 처음부터 돈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며, 셋째는 ‘혹시… 입금해주셨나요’라고 묻기 전에 입금을 완료하는 사람이다. 동방예의지국에 살아서 그런지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데에도 너무 큰 에너지가 든다. 그 에너지를 덜어주는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다.

힘든 점도 있다. 나를 책임져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아무도 나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매번 최선을 다해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게 가끔은 지친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온라인 마케팅 회사 사장님은 말했다. “성은 씨는 영상을 만든 그 순간만 증명하면 되잖아요. 저희는 계약 기간 내내 증명해야 돼요. 분명 3개월이 지나야 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왜 첫 달부터 ‘좋아요’ 수가 안 오르느냐고 쪼아대니 아주 똥줄이 탑니다.” 다른 사람의 고충을 듣는다고 해서 내 고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큰 힘이 되었다.

가끔은 내가 하루살이처럼 느껴진다. 향후 한 달 치 스케줄만 잡혀 있을 뿐 그 너머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요즘 친하게 지내는 90년생 친구는 말했다. “미래 계획 같은 거 세우지 마. 인생 그래프 그리는 시간은 하등 쓸모없더라. 18세의 내가 꿈꿨던 대로 28세의 내가 살고 있니? 현재만 보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수능 본 게 내 인생에 더 도움 됐어?” 그러면서 최근 빠져있는 노르웨이 드라마 ‘SKAM’의 한 장면을 얘기해주었다.

“이삭과 에반의 ‘1분 잇기 게임’이란 게 있어. 미래 얘기 따윈 넣어 두고,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는 거지. 우리가 1분 동안 생각해야 할 건 그 다음 1분인 거야.”

“그거 참 좋네. 그래서 드라마에선 1분 동안 뭘 하는데?”

“‘1분 뒤에 너에게 키스할 거야’라고 말해.”

이런 드라마 같으니…. 하지만 문득, 우리에게도 아주 많은 1분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프리랜서#1인 사업자#책 메이커의 시대#노르웨이 드라마 sk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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