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홍수영]유통기한이 짧은 ‘여의도 언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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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영 정치부 기자
홍수영 정치부 기자
올해 1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집단 탈당한 개혁보수 신당파가 새 당명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때다. 대선 주자였던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주장이 엇갈렸다. 유 의원은 보수의 본류라는 게 선명한 ‘보수당’에 마음이 있었다. 반면 남 지사는 ‘미래를 위한 전진’ 같은 아예 새로운 그릇을 원했다. 굳이 당명에 보수라는 이념을 명시해 외연을 좁힐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였다. “정말 ‘보수당’으로 하겠다면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생각은 지우라”고도 했다. 바른정당이란 당명은 그 타협의 산물이었다.

2월에는 바른정당에 보수 후보 단일화 공방이 벌어졌다. 유 의원의 말이 화근이었다. “문재인을 이길 수 있는 보수 후보로 단일화해서 대선을 치러 보자는 게 보수의 대의명분”이라고 했다.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남 지사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왜 탈당을 했나. 그 안에 남아서 후보가 되면 되지”라고 몰아붙였다. 바른정당이 창당대회를 치른 직후였기에 마땅한 지적이었다. 유승민 캠프 의원들이 “유 의원이 실수한 게 맞다. 실수를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느냐”며 남 지사를 원망할 정도였다.


그런 남 지사의 말이 요즘 심상찮다. 열차는 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치켜세우며 출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을 “대표직을 건 승부수”(10월 24일)라고 평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보복의 길로 가고 있다”(11월 18일)고 한국당의 대여투쟁에 힘을 싣는가 하면, 최근 “보수통합이 우선”이라며 국민의당과 통합을 논의 중인 유 대표를 비판했다. 하나씩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수년 동안 여의도를 취재하며 눈치가 생겼다. 정치인이 차곡차곡 말을 쌓을 땐 이유가 있다. 궤도 변경을 위한 명분 쌓기일 경우가 많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다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드라이브 속에 보수, 진보 양 극단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커졌다. 그만큼 ‘제3지대’의 정치적 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더군다나 내년 지방선거 무대에 직접 올라야 하는 남 지사의 고민을 모르지 않는다. 그에겐 보수의 성적표가 자신에게 달렸다는 책임감도 남다를 테다. 하지만 돌아보면 한국 정치사에 언제는 진영 논리를 깨는 정치 실험이 쉬웠던가. 한나라당 시절부터 당내 선거가 있을 때마다 ‘중도 외연 확장’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던 남 지사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당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남 지사에게 그의 언어로 물어야겠다. 남 지사는 연정(聯政)을 자신의 정치적 브랜드로 삼으며 “보수끼리 뭉치고 진보끼리 뭉치는 진영 싸움은 과거 정치”(2월 9일)라고 했다. 또 “이름 바꾸고 3명 징계했다고 다시 한국당과 손잡자고 한다면 도대체 바른정당이 왜 태어났느냐”(2월 28일)고 물었다. “선거에 불리하다고 뭉쳐보자는 것은 명분이 없다”(3월 20일)고도 했다. 남 지사가 그간 외쳐온 ‘진영을 깨는 정치’는 그저 다른 보수 정치인과 차별화하려는 포지셔닝 전략이었는가.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다. 원칙만 고집하는 건 정치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핵심 정치 철학을 상황 논리에 쉽사리 내어주는 건 다른 문제다. ‘여의도 언어’의 유통기한이 짧다고 해서 국민이 그 말을 다 잊는 건 아니다.
 
홍수영 정치부 기자 gaea@donga.com
#여의도 언어#남경필 경기도지사#궤도 변경을 위한 명분 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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