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임우선]교육부의 ‘노답’ 지진 매뉴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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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20일 오전 11시 정부서울청사 311호.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 범부처 지원 대책 합동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10명이 넘는 기자가 손을 번쩍 들고 사회자로부터 질문 기회를 요구했다. 교육부가 이날 ‘보완 버전’이라며 공개한 ‘지진 발생 시 행동요령’ 매뉴얼에 대해 물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날 매뉴얼은 기자 수십 명이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당최 수능 날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길이 없는, 그런 매뉴얼이었다. 질의가 1시간 넘게 계속됐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교육부는 급기야 반강제로 브리핑을 종료시켰다.

이날 교육부가 공개한 행동요령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건 수능 도중 지진 발생 시 대피부터 시험 중단까지 모든 대응을 ‘시험장 책임자(교장) 또는 시험실 감독관(교사)’의 판단에 따르도록 한 점이었다. 이들이 판단 근거로 삼을 만한 명확한 기준 제시조차 없이 시험을 강행할지, 시험을 중단했다 재개할지, 아니면 다 관두고 밖으로 대피할지 등 모든 결정을 교장, 교사에게 맡기고 있었다.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존중하겠다’는 미명 아래.

그러나 교장과 교사는 재난 전문가도, 대피 전문가도, 구조물 안전 전문가도 아니란 점이 문제다. 대피 판단의 전문성으로 보자면 차라리 포항소방서 소방관들에게 대피 결정 권한을 맡기는 게 합리적인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행정적으로 시험장의 최종 관리자가 해당 학교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부는 모든 걸 교장에게 맡겼다. 그야말로 공무원적인 발상이었다.

만약 대피 비전문가인 교장이 현장 상황을 과소 또는 과잉 판단해 안전사고가 나거나 시험이 무효 처리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까. 수능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국가를 상대로 한 송사가 불거진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국가는 해당 책임자를 100% 보호해줄 것인가? 더군다나 이들은 모두 단 한 번도 매뉴얼 실전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매뉴얼 공개 직후 일선 교원들 사이에서는 “부담스럽다”는 호소가 터져 나왔다. 21일 교육부는 뒤늦게 ‘교장과 교사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교원들에겐 큰 위로가 안 되는 분위기다.

교육부의 이날 매뉴얼은 내용을 떠나 형식 그 자체도 문제였다. 매뉴얼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를 정리한 것이다. 쉽고, 명확하고, 직관적이며, 논리적이어야 함은 기본이다. 하지만 교육부 매뉴얼은 모호한 표현과 복잡한 문장이 A4용지 2장에 걸쳐 꽉 채워져 있는 탓에 한 번 읽어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숙지하기 어려웠다. 명쾌한 삽화와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된 일본의 매뉴얼이 떠오르면서 ‘이것이 바로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국격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매뉴얼 공개 후 비난에 가까운 질문이 쇄도하자 막판에 교육부는 기자들을 책망하듯 ‘수험생들을 위해 불안감을 조성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국민의 불안감은 지진이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똑똑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모두가 행운만을 기대할 때에도 현실을 직시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어떠한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는 것이 공직자의 본분이다. ‘안 좋은 상황을 가정하지 말아 달라’는 교육부의 부탁이 진정 수험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노답 매뉴얼’을 만든 공무원의 초라한 변명으로 느껴졌던 이유다.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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