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꽃씨로 찍는 쉼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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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로 찍는 쉼표 ― 이은규(1978∼ )
 
먼 이야기
어느 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
왕은 그들에게 꽃씨를 나눠주며
가장 잘 간직한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지
간직이라는 말에 방점을

첫째 아들은 바람 한 줄기 없는 금고 속에 꼭꼭
숨겨두었고

둘째 아들은 꽃씨를 팔아 더 귀한 꽃씨를 샀다

셋째 아들은 꽃씨에 오래 귀를 대고 있다 심고
가꿨다는 이야기

지금 꽃씨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저 허공 속에 있다고 답했다는 셋째 왕자
바람이 간직하고 있다는 말

꿈에 사막을 걷다
쉼표 모양으로 끝이 살짝 삐친 꽃씨를 심었다

 
 
시 창작은 직업이 못 된다. 시를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만큼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은 시가 돈이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시인이 경제관념과 거리가 멀다.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면, 이들이 돈과 가깝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최첨단 도시에서 악몽을 꾸는 시인도 있고, 미풍 속에서 고운 꿈을 꾸는 시인도 있다. 악몽이든 길몽이든 모든 시인은 저마다의 꿈을 꾼다. 돈을 꿈꾸지 않고 꿈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들은 비현실주의자이고, 엉뚱한 사람들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이다. 그러나 그 상상의 꿈속에서 우리는 낯설고 익숙한 빛, 혹은 희망, 또는 에너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은규 시인은 세상에서 만나는 장면을 꿈꾸는 듯 그려내는 시인이다. 시인의 꿈속에서 한 왕은 세 명의 왕자에게 세 개의 꽃씨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세 명의 왕자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간직했다.

첫째 아들의 방식은 유지와 계승을 중시하는 구시대적 방식, 둘째 아들의 방식은 경제 논리를 따르는 근대적 방식을 상징한다. 그리고 시인은 셋째 아들의 방식을 지지한다. 귀를 기울여 꽃씨의 마음을 듣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방식. 꽃씨를 오용하지 않고 꽃씨가 지닌 뜻에 따르는 방식. 그것이 지닌 가능성을 내일로 연장시키는 방식. 이 셋째 아들의 방식은 현재를 구하지 않고 미래를 구한다. 이것이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시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시인들이 꿈꾸는 방식이고 이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꽃씨로 찍는 쉼표#이은규 시인#세 명의 왕자 세 개의 꽃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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