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72>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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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최정례(1955∼)

여자는 빨래를 넌다
삶아 빨았지만 그다지 하얗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햇빛이 동쪽 창에서 서쪽 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자는 서쪽으로 옮겨 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
서쪽 창의 햇빛도 곧 빠져나갈 것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봄이 있었다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어쨌든 네가 입게 된 옷이야
벗어버릴 수는 없잖아 예의를 지켜
얼어붙었던 것들은 녹으면서
엉겨 매달렸던 것들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형이 다니는 피아노교습학원 차를
타고 싶어서 쫓아갔다가 동생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얘기
그가 라디오에 나와 연주하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멀리 산이 보였었는데
이 집은 창에 가득 잿빛 아파트뿐이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것
우연은 간곡한 필연인가
우연이 길을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 했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르렀겠지
잃어버린 봄, 최초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때인 것 같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오른다
우연과 필연이 서로 꼬리를 치며 꼬드기고 있다
문득 서쪽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다


여자는 그럭저럭 유복한 환경의 주부며 시인이다. 오전에는 동쪽 창으로, 오후에는 서쪽 창으로 햇빛이 드는 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고 한다. 모든 게 성에 차지 않는다. 빨래는 ‘삶아 빨았지만 그다지 하얗지가 않’고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란다. 여기 여자가 제 현재 삶이 잿빛이라 느끼는 근원이 있다. 빨랫감은 삶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 빨래를 널어놓은 뒤에도 햇빛을 따라 부지런히 옮긴다. 매사 공들이는 완벽주의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일의 열매가 달콤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건만 각광(脚光)도, 활개 치며 나는 기쁨도 없이 ‘여기에’, 앞으로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나이에 이르렀단다.

억울함에 찬 이 예민한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푸념하고 그에 냉정한 이죽거림으로 쓰라림을 더하는 마음속 대화가 맛깔스럽다.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 그런데 거기로 돌아갈 길이 없네. 어쩔까나, 저녁이면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도록 온종일 마음이 요동치는 이 에너지!

황인숙 시인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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