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짝퉁의 경쟁력

이현두 스포츠부장 입력 2015-01-01 03:00수정 2015-01-01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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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두 스포츠부장
신치용 프로배구 삼성화재 감독은 매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올 시즌은 정말 만만한 팀이 없다. 정말 힘들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상대팀 감독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시즌까지 그는 7년 연속 우승 반지를 꼈다. 올 시즌 역시 삼성화재는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 시즌까지 그는 경기장에서 긴장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올 시즌은 달라졌다. 신 감독을 긴장시키는 감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세진 OK저축은행 감독이다. 신 감독은 OK저축은행이 제일 버거운 상대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에 발린 칭찬이나 엄살이 아니다. 지난 시즌 창단한 신생팀의 사령탑으로 처음 감독 생활을 시작한 김 감독은 지난해 신 감독에게 2번이나 패배를 안겼다. 올 시즌에는 신 감독과 2번의 승리와 2번의 패배를 나눠 가지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20년째 삼성화재 감독을 맡으며 배구판의 제갈공명으로 불릴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은 신 감독을 초보 감독인 김 감독이 긴장시키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짝퉁 배구다. 김 감독은 2006년 은퇴하기 전까지 11년 동안 삼성화재에서 뛰었던, 신 감독의 애제자다. 당연히 신 감독의 수를 훤히 꿰뚫고 있다. 신 감독과 김 감독이 올 시즌 첫 대결을 벌이기 전 경기장 인터뷰 때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략과 지도방식 등에서 똑같은 말을 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 올 시즌 두 팀은 코트에 나서는 선수만 다를 뿐 팀의 플레이 스타일은 쌍둥이에 가깝다.

비슷한 일이 몇 년 전 프로야구에서도 있었다. 김성근 한화 감독과 조범현 KT 감독이다. 조 감독은 선수 시절 김 감독의 애제자였다. 은퇴 후 감독에 오르기 전까지 코치 경력도 대부분 김 감독 아래에서 쌓았다. 그런 두 감독이 2009년 프로야구 우승을 놓고 만났다.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 감독은 2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야구의 신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김 감독이 3년 연속 우승의 길목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KIA를 맡고 있던 조 감독이었다. 김 감독을 따라서 기록을 토대로 하는 철저한 관리 야구를 해 ‘김성근 아바타’로 불리기도 하는 조 감독은 당시 승부에서 김 감독을 꺾고 감독으로서 첫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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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에서 짝퉁 바람은 지난해에도 이어졌다. 한 시즌 200안타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서건창은 지난 시즌 자신만의 타격 폼을 만들었다. 보기에 따라 우스꽝스럽기도 한 폼이지만 서건창은 그 폼으로 성공 신화를 열었다. 그러자 서건창 못지않은 기량으로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받고 있는 두산의 정수빈이 서건창을 따라 했다. 그것도 단순 모방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복사판이다.

짝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것이다. 개성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요즘 세태에선 더욱 그렇다. 그래서 새로 사령탑에 오르는 감독들은 대부분 새로운 스타일과 새로운 플레이를 강조한다. 짝퉁의 길을 가는 감독과 선수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짝퉁을 선택한 것은 성과와 성적이 더 중요해서다. 그들은 프로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경제 성장에 가장 큰 힘이 된 것도 짝퉁 정신이다. 짝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도 짝퉁이라는 말이 싫다면 선수들이 하는 좋은 말이 있다. 롤 모델이다. 누구를 닮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품과 달리 그것에는 흉내를 내도 저작권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 새해 첫날 나만의 롤 모델을 정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이현두 스포츠부장 ruchi@donga.com
#짝퉁#신치용#삼성화재 감독#롤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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