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이란 이름은 자주 명품과 부에 대한 욕망을 대신한다. 패션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청담동 피플’은 대부분 럭셔리, 즉 사치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화폐개혁’이라도 했는지 가격을 줄여 쓰는 가게들이 많아 ‘변두리에서 온 그대’들이 종종 당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예를 들면 350,000원을 ‘350.0’이라고 쓴다). 청담동 하늘엔 공중방어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날아오는 불경기나 불행 같은 것들은 아예 격추시키는 게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적어도 한두 해 전까지는.
얼마 전 그 청담동에서 ‘부티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여직원은 신인 탤런트처럼 예쁘고 친절했지만, 대사를 잊은 표정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탈리아산 가죽 소파와 오스트리아에서 공수해 온 샹들리에가 있는 ‘청담동 부티크’는 관 속처럼 추웠다! 그녀는 나를 위해 허둥지둥 히터를 켰다. 나중에 들으니 청담동에도 불경기라는 외계인이 찾아와 이곳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손님 방문이 예정돼 있을 때만 조명과 난방을 하고 사장 겸 디자이너도, 직원도 작은 전기난로를 쓰는 모양이었다. 가까운 곳에 SBS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패션왕 코리아’에서 인기를 얻은 디자이너의 매장도 있었는데 사정은 비슷했다.
“이름은 좀 유명해졌어요. 하지만 결국 ‘패션왕’은 대중적이어야 했어요. 나 같은 사람은 패션으로 먹고살기 어렵겠다는 걸 확인한 셈이죠. 그래서 식당을 내려고 하는데 컬렉션 준비와 겹쳐서 정말 힘들어요.”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한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직원 월급 내역’이 견습은 10만 원, 인턴은 30만 원, 직원은 100만 원 남짓이라고 알려져 파장이 커졌지만 이런 사실에 놀라는 ‘청담동 피플’을 보지 못했다. 이곳만의 일이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악순환을 타개하기 위해 세계 시장 진출이 유일한 정답이라며 한때 정부는 뉴욕과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하고 대기업은 유행처럼 한국 디자이너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한류’ 패션쇼에 참여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진 빚과 명품 수입이 주요 업무가 된 ‘해외사업부’뿐이다.
패션 관계자들에게 한국 패션의 세계화가 어려운 이유를 물으면 공통적으로 창의적인 비주류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을 꼽는다. 10만 원 받는 견습부터 TV에 출연하는 유명 디자이너들까지 팔리는 상품을 만들지 못하면 탈락이다. 다양성도, 다음번도 없다. 예술이면서 산업인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은 정책의 부재나 기업의 유통망 독식 등 구조적 문제와 관계없이 오로지 개인의 재능 없음과 불운, 노력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인격은 물건을 잘 팔아치우는가와 비례하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불필요하다. 패션이든 철강이든 탄소든 똑같다. 그것이 ‘미생’의 원인터내셔널에서 전 국민이 ‘견습’하는 바가 아닌가.
환상일지언정 패션을 꿈꾸던 앨리스들이 사라진 청담동에 장그래들만 남는다.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란 ‘판매’이기에 팔리지 않는 패션이란 개똥만큼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장그래들은 탐욕스럽기는커녕 선량하고 성실하다. ‘미생’이 슬픈 이유다.
지금 패션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역설적으로 패션을 복사용지처럼 파는 홈쇼핑 채널밖에 없다. 청담동 장그래들이 패션계의 원인터, 그곳에서 옷을 판다. 오전 1시, 나는 ‘미생’만큼 흥미진진하게 홈쇼핑 채널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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