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그림엽서의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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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된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집에서 산 그림엽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된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집에서 산 그림엽서.
여행 취재를 하다 보면 그곳의 기념품에도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기념품 상점에 들러 두리번거려 봅니다. 그런데 기념품이란 게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지명이 인쇄된 머그나 냉장고 문에 붙이는 자석 장식, 티셔츠, 모자…. 그중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그림엽서(Postcard)입니다.

그림엽서라고 하면 대개는 좀 식상해할 겁니다. 어딜 가나 있는 데다 너무도 고답적인 기념품이니까요. 게다가 요즘 그림엽서를 써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앱을 이용하면 사람이든 경치든 생생한 모습을 즉석에서 촬영해 지구촌 어디라도 날려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외국 관광지에서 그림엽서를 고르는 한국인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엽서란 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국의 경우입니다만. 전 취재차 찾은 외국에서 그림엽서를 꼼꼼히 살피는 편입니다. 수많은 그림엽서 속에는 그곳의 다양한 풍경―특히 특정한 시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아서지요. 여행자는 늘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본 풍경과 다른 풍경을 그림엽서로라도 봐 둘 수밖에요. 그림엽서는 사진촬영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풍경을 가장 멋지게 잡을 수 있는 앵글과 구도를 가늠케 해주니까요.

그런데 그런 도움과 재미를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관광지에서 그림엽서를 보기가 어려워서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엽서가 천대받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맘먹고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최근엔 외국처럼 눈에 띄게 전시된 그림엽서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몇 주 전 서귀포에서 겪은 일입니다. 독일어권의 외국인이 그림엽서 파는 곳을 알려달라는데 궁색한 변명만 했습니다. 결국에는 관광안내소에 물어봐야 할 거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림엽서를 볼 수 없는 한국. 아마도 그림엽서를 보내거나 받아보지 못한 경험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닐는지요. 그립엽서를 받아본 적이 있다면 아마 공감할 겁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이며,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전혀 기대치 않았던 사람이 보낸 것이라면 감동은 더 커집니다. 유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쓴 손 글씨에 담긴, 보내는 사람의 심중을 읽어 내려가는 행복이라니. 단언컨대 그림엽서는 보내고 받는 그 자체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입니다.

지난해 시월이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아마도 1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데―그림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달포 전 유럽성지순례를 다녀온 아내가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 생가에서 사서 부친 것입니다. 베로나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곳이라 엽서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키스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아내가 이미 귀국한 상태였습니다. 여행 중 보고 느낀 걸 시시콜콜 입으로 죄다 풀어헤친 뒤였지요. 그러니 그 엽서의 효용가치―안부를 전하는―는 별무할 거란 게 당연한 짐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장의 엽서가 이역만리 먼 곳으로부터 내 집까지 오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나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녹아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멀리서, 그것도 여행 중에 나를 생각해 주었다는….

전 며칠 전에도 그림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달포 전 퇴사하고는 더 늦기 전에 유럽을 배낭 메고 여행하고 싶다며 도움말을 구하러 왔던 20대 후배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 그녀에게 엽서 쓰기를 조언했습니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는데 그 엽서가 그녀의 안부와 행선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퇴사 후 얼마 안 돼 여행을 떠났고 제가 적극 추천한 아이슬란드로 날아간 듯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애 꼭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던 오로라를 보았답니다. 엽서는 그 직후 보낸 듯한데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평생에 유일할지도 모르는 경험을 덕분에 해보네요’라고. 그 엽서가 저를 얼마나 기쁘게 했을지 짐작하실 겁니다.

그래서 권하는데 그런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스스로 먼저 그림엽서를 쓰세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그걸 지켜보는 건 더 큰 행복이니까요. 내가 보내면 나도 받게 됩니다. 그림엽서, 그건 곧 ‘행복엽서’가 아닐는지요.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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