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7>애가(哀歌) 제14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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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哀歌) 제14
―프랑시스 잠(1868∼1938)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눈이 오네.” 너는 말했다.
“눈이 오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런 뒤, 너는 말했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더 정말 좋아.”

“여름은 갔어.” 너는 말했다.
“가을이 왔어.” 나는 답했다.

그 뒤 우리의 말은
처음처럼 비슷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너는 말했다.
“내 사랑아, 네가 참 좋아.”

매맑고 숭고한 가을날의
노을 눈부신 저녁빛을 받으며.

나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렴.”


조흔파 선생의 한 명랑소설에 이 시의 첫 연이 실려 있었다. ‘이게 다야? 별 싱거운 시도 다 있네’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 감상이었다. 그런데 그 시구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짧고 쉽기도 했지만 뭔가 새콤달콤한 맛이 감돌았기 때문이리라. 제목도 지은이도 몰랐던, 내 어린 날의 사랑의 시여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 ‘너를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이런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좀더, 좀더” “이렇게, 이렇게” 연인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웅얼거린다. 보는 이가 수줍어지도록 숨 가쁘게 펼쳐지는 사랑의 정경을 시인은 간결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처리한다. 그런데 제목이 왜 애가일까? 그러고 보니 둘째 연에서는 눈이 온단다. 시의 배경은 이제 막 여름이 지난 가을인데 눈이 오다니…. 베개라도 터진 걸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횡설수설일까? 어떤 말도 맞장구치던 연인들이 제가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건 사랑이 기우뚱거리는 조짐일지도. 그러다 할 말이 뚝 끊기겠지. 사랑의 조락(凋落)을 암시하듯 때는 가을날 저녁, 창밖 하늘에 진홍빛 노을이 가슴을 죄며 퍼져 나가네. 내 사랑아, 다시 한 번 사랑한다고 말해주렴!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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