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거짓말의 늪에 빠진 대화록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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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왜 국가기록원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친노(친노무현)와 민주당 사람들은 그것을 노 전 대통령의 선의(善意)로 포장한다. 대화록을 국가기록원에 보내면 국가정보원이 갖고 있는 대화록도 대통령 지정 기록물 취급을 받아 그것마저 후임 대통령들이 최소 15년, 최대 30년간 볼 수 없게 되기에 그런 상황을 막아주기 위한 배려였다고 말한다.

그럴싸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면 당연히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 측에 분명히 알려줬어야 한다. 그래야 후임자가 마음 놓고 국정원의 대화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줬다는 사람도, 통고받았다는 사람도 없다.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노무현 측 사람들은 거꾸로 “대화록을 분명히 국가기록원에 보냈다”고 말해 왔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정원의 대화록이 대통령기록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말도 맞지 않다. 국정원 것은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국가기록원 것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 관리된다. 적용법이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같이 취급할 수 있는가. 같은 국정원에 있는 김대중-김정일 대화록은 2급 기밀인데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은 그보다 열람과 공개가 훨씬 까다로운 1급 기밀로 지정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선의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더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갔던 복제 이지원(청와대 문서관리시스템)에 대화록이 존재하고 그것이 지금 국가기록원에 있으니 사초(史草) 실종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봉하마을 이지원은 노 전 대통령이 무단 반출했다가 5개월 뒤 법 위반 논란이 일자 마지못해 반납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봉하마을에 그대로 있을지 모른다. 있어야 할 사고(史庫)에는 없고 개인의 사유물로 취급한 것에서 나온 대화록을 어떻게 사초라고 우길 수 있나.

작년 10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의 폭로로 노 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의혹이 불거지자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정상회담에서 NLL 문제는 거론조차 안 됐다”고 반박했다. 그는 “NLL 관련 이야기가 나왔으면 배석했던 우리가 깜짝 놀랄 일인데 그냥 넘어갔겠느냐. 국민 앞에 명예를 걸고 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국정원의 대화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 외에도 대화록의 내용은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그러자 친노와 민주당 사람들은 국정원 대화록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고, 대조를 위해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을 ‘원본’ 수색에 나섰으나 찾지 못하자 이번엔 이명박 정부의 폐기 가능성을 거론했다. 하지만 원본은 애당초 노무현 청와대에서 국가기록원으로 넘어가지도 않았고, 정작 원본을 폐기하고 수정본을 빼돌린 것은 노무현 측으로 드러났다.

대화록을 둘러싼 그들의 거짓말, 억지 주장, 말 바꾸기, 둘러대기 행진이 끝이 없다. 잘못이 드러나면 차라리 솔직히 시인하고 매를 맞는 편이 오히려 국민의 신뢰를 높여줄 텐데 정치를 왜 그렇게 하는지 답답하다. 혹시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건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고, 한 사람을 오래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에이브러햄 링컨(미국 16대 대통령)의 경구도 모르나.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노무현 전 대통령#정상회담 대화록#국가기록원#이지원#N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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