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천년을 피해자 의식에 갇힐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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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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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일본역사를 하나의 옷감으로 본다면 그 중심에 있는 실이 바로 천황이라고 생각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06년 처음 총리가 되기 전에 ‘아베 신조 대론집’에서 밝힌 황국사관이다. 그는 역사왜곡 주도세력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1996년 나오기 전부터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에서 이를 논의한 ‘선각자’였다. 대동아전쟁이 침략전쟁 아닌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고, 군위안부는 일본 정부가 개입해 강제 연행한 게 아니라고 일찌감치 결론까지 내렸다. 올 초 다시 내놓은 ‘새로운 나라로’라는 저서에선 되레 일본이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묻어난다.

자신들만 신의 민족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신기하다. 북한도 자기네가 신정(神政)국가라고 믿는 김정은 집단이 통치한다. 그런 비정상 국가를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까이 둔 우리 운명도 참 기구하다.

이런 아베에 대한 일본 내 지지율이 70%를 넘어섰다. 경제가 살아난다는 희망 때문이라지만 해외 시각은 싸늘하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지(紙)는 “150년 전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은 6·25 같은 남의 전쟁을 통해서만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구조개혁 없이 단기 해법에 집착한 아베노믹스가 중국과 한국의 경쟁력 위협을 이길지 회의적”이라고 했다.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정치 리더들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고, 지금도 끌고 가고 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백번 옳지만 실행은 기대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는 대목도 수사학적으로만 폼 난다. 역사는 변하지 않아도 의식과 현실은 변할 수 있다.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고 프랑스가 피해자였지만 50년 만에 입장이 뒤집힌 게 단적인 예다.

1871년 프로이센이 독불전쟁 승리 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 대관식을 올릴 때만 해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뒤처진 나라 중 하나였다. 1806년 나폴레옹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한 뒤 프로이센은 오히려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프랑스를 전범(典範) 삼아 개혁을 시작했다. 피해자가 너무 잘나가서 1913년 처음으로 프랑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추월해서는 급기야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정도다.

전후 프랑스는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로 세계 5위 경제로 올라섰으나 거기까지다. 21세기에도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라는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세상 변화와 자유시장경제에 냉담했다. 침략당한 역사 때문에 남들이 세계화 자유화 민영화로 갈 때도 자신들만의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는 피해자 의식과 공포에 갇혀 있다는 게 미국 하버드대 인류학자 로런스 와일리의 분석이다.

두 나라의 운명은 2000년 역전됐다. 유럽연합(EU)은 유럽을 프랑스화(化)해 프랑스의 위상을 회복하고, 독일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묶어둬 다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프랑스의 계산에서 태동했지만 결과는 거꾸로 됐다.

독일은 통일과 ‘큰 정부’의 후유증으로 경제가 흔들리자 2003∼2005년 하르츠 구조개혁을 통해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우뚝 섰다. 전쟁으로 쟁취 못한 절대강자의 반지를 유로위기 속에서 경제적 헤게모니로 거머쥔 셈이다. 프랑스는 2000년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줄이는 식의 청개구리 개혁을 감행했다. 그해 역전된 두 나라 소득은 계속 벌어지는 추세다. 프랑스 실업률은 독일의 두 배이고 국가부채는 GDP의 90%까지 치솟아 ‘경제 바스티유’로 간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1월 22일은 독일과 프랑스가 역사적 화해를 다짐한 엘리제조약 50주년이었다. 그러나 성대한 기념행사는 거죽뿐이고 독불 관계는 화기애애하지 않다. “두 정상이 공식 석상에서는 tu/du(친밀함을 표현하는 2인칭 대명사)로 말하지만 사석에선 영어를 쓴다” “유럽통합의 엔진이던 독불 관계가 브레이크로 변했다”는 기사가 난무한다. 특히 독일의 중립적 주간지 슈피겔은 “프랑스의 과거 강박증이 개혁을 막고 있다”며 “메르켈은 프랑스 대통령이 자국 경제뿐 아니라 유럽까지 망칠까 두려워한다”고 개탄했다.

독일에 못지않은 과거사를 지닌 일본이 반성은커녕 기고만장 과대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그들 문제다. 그렇다고 일본에 침략당할 우리도 아니니 불치병 환자 보듯 하면 된다. 환자라고 협력과 공존까지 못할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보다는 나와 내 자손들이 천년만년 살아야 할 우리나라가 걱정스럽다. 우리가 일본에 당한 역사가 임진왜란과 식민지 강점까지 합쳐도 50년 미만이다. 앞으로 950년 이상을 우리 후손들이 “나는 피해자”라며 살아야 한다면 끔찍하다.

식민지 시절에 뿌리박힌 남 탓하기 같은 피해자 의식과 관존민비의 식민지 잔재에 빠져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신정국가는 신에게 맡기고,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구조개혁부터 힘써 일본을 경제적으로 이겨봐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아베 신조#일본#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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