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인사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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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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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여자들이 선망하는 ‘시월드’가 공직자 집안이다. 미혼여성뿐 아니라 딸을 둔 엄마들도 시아버지 자리가 공무원 군인 교사 출신이면 아주 반색을 한다.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교원연금을 넉넉하게 받으니 자식에게 손 내밀지 않을 게 분명해서다.

박근혜 차기 정부의 첫 조각은 우리 시대 진짜 특권층이 공직자 계급임을,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전통적 가치관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재확인시켰다. 총리 후보자를 포함해 어제까지 발표한 17개 부처 장관 후보자 중 10명이 관료 출신이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지만 대통령에게는 인사가 메시지다. 국민이 보기엔 어떻게 해야 성공이 가능한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진짜 양극화는 공(公)계급과 민간인의 격차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요즘이다. 공직에선 규제라는 칼자루로 민간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권력을 휘두르고, 퇴임 뒤에는 국민연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풍족한 연금을 국민 세금으로 보태 받는다.

심지어 지난주 1차 발표된 후보자들은 수완도 좋다. 바쁜 공직생활 중에 시테크 재테크에도 일가견이 있는지 부동산투기로 의심되는 투자나 세금 탈루로 알뜰하게 재산을 불린 이도 꽤 된다. 정홍원 예비 총리는 “나는 보통사람”이라는데도 국민주택 청약을 노려 위장 전입한 전력이 있다. 보통사람은 꿈도 못 꾸는 로펌이나 기업, 대학에 재취업해 전관예우로 추정되는 막대한 보수를 받은 특권은 부럽다 못해 분노가 치밀 지경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관료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봐야 한다. 대형 로펌들이 관료 출신을 월 1억 원씩 주고 모셔가는 것도 이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로비스트가 의회를 상대로 로비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로펌으로 옮겨 간 관료 출신들이 기업 같은 이익집단을 대리해 ‘친정’을 상대로 로비를 한다. 관-업계-로펌이 먹이사슬처럼 연결된 티타늄 트라이앵글이다.

결국 “다시 한 번 잘살아보자”는 당선인의 구호가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출세해 악착같이 돈 벌자는 속뜻이었다면, 허무하다. 당선인은 청년창업을 대폭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창업을 꿈꿀 게 아니라 공무원시험에 올인 하는 게 훨씬 전도가 양양할 것 같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2000원짜리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7전8기를 꿈꿔온 공시족(公試族)은 아자! 조금만 더 힘내자! 건배사를 외칠 판이다.

공직사회에 주는 메시지도 결코 가볍지 않다. 당선인 측은 평판 좋고 추진력이 강한 관료 출신을 장관으로 보내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국가 개조에 나서게 하려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평판이고 추진력이냐다. 장관 후보자들의 퇴임 직전 자리를 보면 어떤 수준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일부 부처에선 “에이스급은 아니고 예스맨 정도” “시키는 일은 일 중독자처럼 해내는 돌쇠형” “청와대만 쳐다볼 해바라기”라는 냉소적 반응이다.

승진에 목숨 거는 공무원 조직문화상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에이스가 장관으로 와야 부처 장악도 가능한 법이다. 장관이 되기 전 국장급으로 여겨질 만큼 존경받기 힘든 인사가 장관으로 왔다고 공무원들이 바짝 긴장해 최고 능력을 발휘할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영혼이 없어야 출세한다거나, 청와대에서 보기엔 역시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 리더)가 최고라는 메시지로 읽히지 않을까 궁금하다.

더 궁금한 건 이런 인선이 어디서 나왔는지이다. 어떤 비선(秘線)이라도 있는 건지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쓴소리 잘하는 이상돈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회 정치쇄신위원장 입에서 나온 “비선조직에 의존한 대통령은 100% 실패”라는 말도 불길하다.

당선인의 한 측근은 작년 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명단 발표를 즈음해 “이제부터 인선은 왕의 시각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당선인이 강조했던 대탕평 인사는 ‘인재를 두루 쓴다’는 조선 영정조 시대 탕평책의 명(明)보다 ‘왕이 인사의 전권을 갖는다’는 암(暗)에 방점이 있었다는 얘기다. 영조가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이조전랑이 대행하던 인사권을 환수하는 탕평책을 폈지만 실제 의도는 왕권 강화였다.

당선인과 오랫동안 정책을 다듬었던 한 전문가는 “경제 쪽도 말 잘 듣는 관료 출신 등의 ‘환관 스타일’이니 경제 역시 대통령 직할 체제로 간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어쩌면 당선인은 대선공약이 너무나 탄탄하고, 국정운영 비전 역시 너무도 확고해 자신감이 넘치는지 모른다. 준비는 됐으니 따라오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온 나라에 전하고 싶을 수도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행동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오만에서 오는 오류를 피하는 방법으로 ‘사전부검(premortem)’을 조언했다. 지금부터 1년 후 시점에서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그 이유를 따져본 뒤 미리 고치라는 것이다.

비선 또는 고독한 결단에서 비롯된 강한 청와대와 약체 내각이 실패 원인으로 꼽힐 경우, 청문회에서 당선인이 강하게 요구했던 자질 검증을 통해 ‘깜’이 안 되는 후보자를 걸러내는 수밖에 없다. 취임 전 국민의 기대치를 최대한 낮춰 반전의 통치술을 발휘할 전략이라면 당선인의 인사는 성공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박근혜 차기 정부#공직자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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