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정동]고종의 워싱턴 공사관 되찾은 의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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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워싱턴으로 부임하는 박정양 공사 일행은 1887년 11월 16일 출항했다. 일행은 이완용, 이하영, 이상재, 이채연 등이었다. 공사 일행 11명은 이듬해인 1888년 1월 9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당시 미국에 주재한 외국 공사관은 41개국이었다. 워싱턴 공관에서 1등서기관으로 근무한 월남 이상재는 잡지 ‘별건곤’(1926년 12월)에 ‘상투에 갓 쓰고 미국(米國)에 공사 갓든 이약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벙어리 외교 그레도 평판은 조왓다”고 했다. “이 상투잡이 공사의 일행인 우리가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조선 국기를 미리 예비하였다”고 쓰고 있다.

내가 공사관을 찾아간 것은 1990년대 초 어느 날이다. 로건 서클(Logan Circle)에 공사관 건물이 있었다. 로건 서클 일대의 건축물은 거의 1875년 이후 1900년 사이에 세워진 것들이다.

이상재의 기록에 의하면 워싱턴 시 공관은 ‘업비태호텔에서 워싱턴시 제15가 1513번지 피셔옥(皮瑞屋)을 빌려 19일 시무식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체면도 서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1891년 새로 구입한 공관은 붉은 벽돌조의 3층 양옥으로 남향의 신축이었으며 응접실·집무실·침실·식당·욕간·변소·창고까지 구비하였는데, 최상층의 전면에는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고 하고 있다. 이 공사관은 층고가 높고 널찍한 방이 9개나 있고 지하실에 또 다른 방들이 있었으며, 공사관 직원 및 그 가족은 2층과 3층에 각각 기거했다 한다.

이 건물이 우리 국가가 소유했던 미국 내 최초의 건물인 것이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이후 미국은 곧 우리나라에 공사관을 설치했으나 우리는 미국에 공관을 설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방해가 심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우리 공사관의 설치를 지시했다.

우리 정부는 1891년 11월 28일 2만5000달러에 이 건물을 샀다. 당시 조선의 재정 형편으로는 엄청난 금액이다. 매매 문서에는 브라운이라는 사람 소유였다. 구입한 사람은 ‘이씨조선 국왕(King of Chosun Ye)’으로 되어 있다. 즉, 대한제국 고종 황제였다.

그러나 1905년 12월 16일 공사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일제의 압력에 의해서였다. 그 후 이 건물은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29일 고종과 당시 일본인 궁내부 차관, 그리고 조민희(마지막 주미 특명전권공사)가 날인해 일본에 넘겨졌다. 매수인은 주미 일본대사 우치다(內田康哉)였다. 그때 양도 가격은 겨우 5달러였다.

그 후 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 갔다. 1972년 5월 이 빅토리아식 3층 건물은 워싱턴시위원회와 미술위원회가 역사적 기념물로 평가해 미국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빼앗긴 근대사 건물을 되찾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 독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 문제는 당시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 일에 앞장선 문화재청과 젊은 파워 엘리트들은 한 세기 전의 일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국외의 주요 역사기념물을 조사하고 보존하여 활용하는 일이다.

그간 워싱턴 공사관 매입을 위해 노력했던 우리 교민들, 특히 워싱턴 동포들은 매우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이제 채우는 일만 남았다. 미국 내 한국 근대사의 현장을 복원하여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문화 공간,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100년의 역사를 채우고 미래 100년을 담아야 할 것이다.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
#고종#워싱턴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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