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주연]성폭행당했다고 자살하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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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연 (사)수원여성의전화부설 통합상담소 소장
송주연 (사)수원여성의전화부설 통합상담소 소장
아들이 피부염을 앓아 예방 차원에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피부과에 갔다. 의사는 “겨드랑이와 접히는 부분, 배꼽 주변, 성기 등에 두드러지게 증상이 나타난다”면서 두툼한 의학백과사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성기가 없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증상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며칠 동안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성은 성기가 없는 존재라니…. 순간적인 모욕감을 느꼈지만 의사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여성은 성기가 없는 불완전한 인체가 아닌, 남성과 똑같은 신체구조를 가졌습니다. 단지 다르게 생겼을 뿐입니다.”

아직도 여성의 성(性)에 대해 이런 무지와 편견이 많은 게 한국 사회다.

얼마 전 추악한 한 인간의 어그러진 욕망 때문에 아깝고도 안타까운 생명 하나가 또 세상을 등졌다. 피자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23세 여대생의 자살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처우문제와 더불어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커피 전문점, 편의점, 햄버거 가게 등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하며 일당 4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을 받는 우리 아이들이 인권침해까지 당하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쓰럽다. 8명 가운데 1명은 “성폭행 또는 성추행을 당했다”(고용노동부 ‘청소년 아르바이트 실태조사’)고 하고 부당한 경험을 한 10명 중 4명의 아이가 “참고 일했다”고 한다. 그나마 10명 중 한 명꼴의 아이가 일을 당했을 때 친구나 교사 혹은 아는 기관의 선생님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길거리에서 차로 납치해 성폭행을 하질 않나, 귀가하는 여중생의 집 앞 아파트 계단에서 하질 않나, 택배기사가 성폭행범으로 둔갑하질 않나…. 대문만 나서면 ‘성 범죄 무방비 지대’다.

나는 여성을 단지 가슴과 성기에 집중하여 바라보는 탐욕적인 관점이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을 만들어 내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행 사건이 특히 많은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지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성폭력이 두렵다. 그리고 그 상처는 너무 깊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교 때까지 10여 년간 엄마의 내연남에게서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한 아이가 재판부에 낸 진정서 일부이다.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이 흔히 상상하는 이성교제나 결혼에 회의적이다. 나에게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남자들도 몹시 경계하게 된다. 누군가가 내게 길을 물어본다거나, 설사 아는 남자와 간단한 대화를 나눌 때에도 이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 성폭행하면 어쩌나 두려움이 든다. 심지어 집 안에 있을 때도 누군가 별안간 침입해서 나를 해할 것 같은 망상에 몇 번씩 문단속을 한다.’

유서에서 사장을 ‘피자 ××’라는 표현으로 저항했던 어리고 예쁘기만 한 내 아이 또래의 그녀, 파리채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던 겁 많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자신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협박을 당하다 보면 견뎌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강요나 무력, 협박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가 제 목소리조차 못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분명히 말하고 싶다. 두 눈 부릅뜬 채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싸우라고 말이다.

부디 자살하지 말라. 죽을 용기가 있거든 자살이나 자해를 선택하지 말고 살아서 가해자를 고소하고, 법적으로 싸우라. 그래서 여성은 ‘성기가 없는 존재’가 아니며, 남자와 다름없는 인간임을 각인시켜야 한다. 부디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그녀가 행복하기를 빈다.

송주연 (사)수원여성의전화부설 통합상담소 소장
#시론#송주연#성폭행#성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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