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헌진]보시라이와 문화대혁명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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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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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40여 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

최근 옛 홍위병이 중국 인터넷에 띄운 참회록의 제목이다. 문화대혁명(문혁) 때의 악행을 뉘우치는 홍위병의 글은 많지만 이 글에 특히 눈이 가는 것은 그녀가 단순한 홍위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본명은 쑹빈빈(宋彬彬)이지만 쑹야오우(宋要武)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966년 8월 18일 베이징사범대부속여중 학생이자 열일곱 살이던 그녀는 홍위병 대표로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접견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들의 영수로 추대하는 의미에서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직접 달아준다. 이후 그녀는 무자비한 홍위병의 대명사가 됐다. 이 이름에는 자신의 은사인 부속여중 부(副)교장을 포함해 7, 8명을 때려죽였다는 등 천인공노할 죄의 꼬리표가 달렸다. 반세기를 숨죽여 살아온 쑹은 “문혁의 피해자와 역사에 대해 반성해 왔다”고 말했다. “스승을 포함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누명”이라며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호소한 그녀의 글 곳곳에는 깊은 회한과 절절한 참회가 담겼다.

문혁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마오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이다. 자본주의 타도와 마오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외치면서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은 집단광기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수십만 명은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와 도덕적 붕괴 등 극심한 혼란을 낳았다.

폐기된 지 반세기가량 흘렀지만 문혁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전형적인 사례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서기의 이른바 ‘충칭모델’과 이를 둘러싼 평가다.

2007년 보 전 서기는 충칭시를 맡으면서 개혁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다헤이(打黑·조직폭력 소탕)’의 깃발 아래 부패세력과 조직폭력배 등 사회악 척결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혁명가요를 부르는 ‘창훙(唱紅)’운동도 펼쳤다. 빈부격차를 해소한다면서 시장원리에 거스르는 경제정책도 진행했다. 이런 충칭모델은 큰 주목을 받았다. 중국의 한 언론사 간부는 사석에서 “여건만 된다면 충칭에서 살고 싶다”며 “집값 걱정도, 범죄도 없는 곳이 아니냐”고 말했다. 보 전 서기의 충칭 서기 재임 기간에 중국 최고지도자인 상무위원 9명 가운데 7명이 충칭을 방문했다. 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지지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보 전 서기의 낙마 이후 그의 통치 아래 진행된 가혹한 인권탄압 사례가 속속 공개되고 복고적인 향수에 기댄 벼락치기 포퓰리즘과 법치를 무시한 인치, 공포정치라는 부정적 평가가 나온다.

충칭모델에 대한 찬사가 드높았던 지난해 가을, 중국의 한 학자는 충칭의 사회악 척결운동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중국 헌법학연구회에서 발표했다. 보고서는 이 척결운동에는 ‘문혁 시기의 특징’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법치를 위반하고, 공민의 기본인권을 침해하며 개인(보시라이)에게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됐고, 공권력과 행정수단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보고서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충칭모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고 있다. 이는 실체적 진실을 떠나 중국 체제의 불안정을 상징한다. 빈부격차와 부패의 해소뿐 아니라 인권의식과 투명성 제고, 민주화 등 근본 문제를 중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지난달 중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문혁을 언급하면서 정치체제 개혁을 강조한 것도 이런 절박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홍위병 대표인 쑹은 참회록 말미에 “다시는 이 같은 동란과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지만 안타깝게도 문혁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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