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훈]독이 든 사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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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지난 휴일 모처럼 역사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다 한 삽화에 시선이 멈췄다. 독일 민족주의 화가 안톤 폰 베르너의 ‘독일제국의 선포’라는 작품이었다.

1871년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1세는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적 심장부에서 즐기는 화려한 파티. 프로이센은 과거 나폴레옹 군대에 대패한 설욕을 이런 식으로 되갚았다.

화가는 바로 이 역사적 사건을 화폭에 담았다. 기자의 시선을 붙든 것은 작품 속 하얀 제복의 인물이었다. 이 이벤트를 기획한 주인공.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부와 명예, 권력을 얻었지만 노동자의 삶은 비참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에, 빵 하나 살 수 없을 살인적인 저임금이 횡행했다. 소외된 노동자들은 단합했고, 사회주의자들이 가세했다. 철혈재상이라 불리던 비스마르크는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노동자를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비스마르크가 1878년 야심작을 내놓았다. 저소득 노동자를 대상으로 의료·산재·노령보험 혜택을 주는 사회보장법을 시행한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주도의 사회보장이 시행되는 순간이었다.

‘탐스러운 사과’.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적중했다. 사회주의자와 결별하는 노동자들이 늘었다. 비스마르크는 미소를 지으며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법을 만들었다. 사회주의 성향을 띤 노동조합은 모두 해체됐다.

이제 100여 년이 흐른 2000년대 초반의 독일을 보자. 탐스러운 사과는 썩었다. 과도한 사회보장 지출은 경제 근간을 흔들었다. 연금, 의료보험 같은 사회보장세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1%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2002년 기준). 같은 기간 영국은 37.7%, 미국은 28.9%였다.

당연히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세금 부담이 커지니 국민의 허리부터 휘었다. 가용소득이 줄었으니 소비도 줄었다. 경기는 침체됐고, 노동시장은 경직됐다. 실업자가 늘었지만 실업급여가 넉넉하니 취직하려 들지 않았다. 전체 실업자의 47.9%가 1년 이상의 장기 실업자로 채워졌다.

결국 독일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실업급여 지급기간을 32개월에서 12개월로 축소하고 육아수당도 줄였다. 지속적인 개혁 끝에 2011년 사회복지 지출 규모는 전년보다 8.3%나 줄었다. 청년 실업률도 떨어졌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독일은 과잉복지의 늪에서 헤어 나오는 듯하다.

반면 국내는 어떤가. 정부나 정치권 모두 무상복지 정책을 연일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무상보육 사례에서도 나타났듯 면밀한 검토 과정이 생략된 무상복지의 부작용은 크다.

정부가 공짜로 복지혜택을 주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생각을 해 보자. 단지 몇조 원의 예산만 늘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복지 지출은 안일한 셈법으로 예측할 수 없다. 고령화 속도는 빨라지고 저출산 문제는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감안해야 할 변수가 많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막무가내 식 무상복지의 피해가 우리 자식 세대에 전가된다는 데 있다. 많은 전문가가 무상복지에 고개를 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년, 아니 5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내일 쓸 곡식을 남겨놓지 않고 오늘 곳간을 싹쓸이하는 게 과연 옳을까. 기자도 무상복지 혜택을 받고 싶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을 죽일 치명적인 독사과를 먹고 싶지는 않다.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뉴스룸#김상훈#무상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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