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문애란 한국컴패션 후원자 겸 자원봉사자·웰콤 고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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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삶을 되돌아보면 정말 많은 분의 사랑과 격려, 보살핌 속에서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누군가의 손에 끌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수 있었듯이 그렇게 지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하곤 한다. “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들 덕입니다.”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 중에서 굳이 꼽자면 3명의 남자를 뽑고 싶다. 첫째 남자는 나의 아버님이시다. 어린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여성 차별이 대세였는데 2남 2녀였던 우리 집은 ‘평등’이 콘셉트였다. 집안행사 때 맛있는 음식이 차려지면 아버지는 우리 4형제에게 조그마한 컵에 술을 한 잔씩 따라주셨다. 남녀 차별은 없다고 몸소 가르친 것이다. 그 덕분에 ‘여자니까’ 하는 피해의식은 없었다.

첫 직장이었던 광고회사에서 남녀의 봉급 차이가 큰 것을 알고 사장님께 당돌하게 말씀 드려 사규를 고치게 했던 용기도 아버지께 받았다. 당시에는 여성 광고인이 거의 없어 최초의 카피라이터라고 인터뷰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기자들이 “남녀 차별 대우를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삶으로 알려주신 ‘평등’ 개념 덕분에 여성 우대로 느낄 일이 내겐 더 많았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광고일을 하면서 내게 가르침을 주신 분이 많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박우덕 웰콤 사장이다. 웰콤을 창업해 일하기 전까지 같은 직장인 코래드에서 일했는데 당시에는 서로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많이 다투기도 했다. 그런데 웰콤을 창립해 함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그의 광고철학과 열정, 고집, 이런 것들이 나의 DNA를 새로운 DNA로 바꾸었다. 그는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새로움에 대한 엔진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광고인으로서의 천재성뿐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로서는 도전의식을 갖게 했고, 삶의 동반자로서는 나 자신의 한계를 돌아보게 하면서 나를 낮추게 한 사람이었다. 잘나가는 여성 광고인, 최초의 카피라이터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던 나에게 그와 같은 파트너가 없었다면 정말 잘난 체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한 곳에 쏠리면 종종 정신을 잃는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배려도 내 삶의 방향을 제 위치로 바꾸어 주었던 것 같다. 한창 파티와 놀이 등에 빠져 ‘놀자모임’까지 있던 나에게 어느 날 그는 조용히 달력을 한 번 봐 달라고 했다. 한 달 내내 까맣게 채워진 약속 중에 회사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많던 모임을 미련 없이 버렸다. 광고의 크리에이티브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는 아무리 큰 광고주라도 제작비를 지나치게 깎으면 과감히 포기했다. 광고주와 대면하며 일하는 난 비굴하지 않을 수 있어 행복했다.

40대 후반부터 나는 은퇴 후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지위나 약간의 풍요로움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크리스천인 나는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구해왔다. 그때 알게 된 것이 국제어린이양육기구인 컴패션이었다.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고 꿈을 잃어가는 어린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 어떤 소명처럼 다가왔다. 그 일을 위해 광고라는 정말 아끼던 일도, 너무나 소중했던 웰콤이라는 회사도 그만두게 됐다. 컴패션을 통해 세계 극빈국의 아이들, 또 그들을 돌보는 많은 분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더 큰 사명을 안겨준 분은 6·25전쟁 때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1952년 컴패션을 만든 에버트 스완슨 목사님이셨다. 우연히 미국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컴패션인터내셔널 창고에서 스완슨 목사님이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일들을 보게 됐다. 1대1 결연, 양육프로그램, 직업학교, 2600개가 넘는 보육원 설립, 런어웨이라는 영화 제작, 어린이코러스…. 그분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많은 일이 한국 땅의 고아들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워 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스완슨 목사님을 나의 멘토로 삼기로 했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하셨을까 생각하며 ‘당신은 천재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분께 들은 대답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아라’였다.

문애란 한국컴패션 후원자 겸 자원봉사자·웰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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