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텐진의 등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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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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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신문기자는 글쟁이다. 소설가는 잘 쓰기만 하면 되지만 기자는 빨리 잘 써야 한다. 체육기자는 더욱 그렇다. 밤마다 촌각을 다툰다. 9회말 실투 하나에, 후반 추가 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승부가 뒤집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난리 속에서도 기사가 읽는 맛이 없으면 혼난다. 기사를 빨리 잘 쓰는 비결 중 하나는 대상을 잘 아는 것이다. 사랑하든가 미워하든가 하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 기자의 경험에 비춰 보면 대상을 1인칭화할 수 있을 때 좋은 글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3일 영결식을 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 지금 솔직히 자신이 없다. 박영석 원정대는 본보가 오랫동안 미디어 후원을 해왔다. 그 주무부서가 스포츠레저부다. 우리 기자들 중 여럿은 그와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다. 하지만 담당이 아니었던 기자는 박 대장과 악수 몇 번 하고, 언제 소주나 한잔하자는 얘기를 나눴을 뿐이다. 체격도 작은 편인데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 게 그와의 짧은 만남에서 느낀 전부였다. 굳이 촌수를 맺자면 박 대장은 후배의 후배다. 기자의 신문사 후배의 산악계 후배다. 그런데도 서로 동갑이다. 신문사 후배가 늦게 입사한 데다 박 대장이 재수를 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서로 깊은 정을 나누지 않아 가까운 지인들에 비해 비통한 마음은 덜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실종 소식은 기자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북한산조차 여태 정상엔 오르지도 못했고 몇 번 가봤을 뿐인 문외한이지만 박 대장이 세계 산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만큼은 잘 알기 때문이다.

기자는 2년 전 텐진의 등과 관련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관문으로 정상 바로 밑 12m 지점에서 시작되는 수직 빙벽. 셰르파 텐진 노르가이는 이곳에서 30분이나 기다려 탈진한 에드먼드 힐러리를 생명줄로 연결한 뒤 표범처럼 날렵하게 빙벽을 올랐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영광을 힐러리에게 양보했다. 힐러리 스텝이라 명명된 이곳을 네팔인들이 텐진의 등이라 부르는 이유다. 힐러리는 다섯 살 연상인 텐진이 사망하고 13년이 지난 뒤에야 이 사실을 밝혔다.

텐진의 등이란 표현에는 힐러리를 깎아내리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힐러리가 세계인의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가 에베레스트 초등자라는 사실보다 이후 55년간 봉사와 희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텐진의 등은 힐러리 경의 남은 삶을 이끄는 최고의 채찍이자 등불이었다.

박 대장의 실종 소식에 큰 안타까움이 남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박 대장은 지난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이어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과 내년 로체 남벽까지 세계 3대 난벽에 코리안 루트를 뚫는 일만 끝내면 현역에서 은퇴해 산악계의 멘토로, 사회사업가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다.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을 통해 얻은 경험과 환희를 젊은이들과 나누고 네팔 등 산악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지을 계획이었다. “정상은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조지 맬러리의 말처럼 하산 후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박 대장은 이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발자취는 후배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을 게 분명하다. 박 대장의 실종은 후배들을 이끌 ‘텐진의 등’이 됐다. 히말라야에 남았기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역설. 슬프지만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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