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태원]‘한미동맹 파괴’의 섬뜩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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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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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2000년부터 외교 안보 분야 취재를 담당해 온 기자에게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79)의 회고록 출간은 묘한 설렘을 줬다. 한미관계가 평탄치 않은 시간을 많이 겪었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집권 8년 동안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 중심에는 혈맹(血盟) 관계 속에 맺어진 한미군사동맹의 전환이 자리 잡고 있었고 럼즈펠드 전 장관은 군사정책 전환의 청사진을 만든 설계자였다. 그의 회고록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and Unknown)’의 출간이 예고된 8일 아침 문도 열지 않은 서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815쪽 분량의 회고를 거침없이 읽어 나갔다.

2001년 1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국방장관을 지낸 그는 한미동맹이 당시 왜 붕괴 직전까지 갔는지를 격정적으로 털어 놓았다. 노회한 정치인의 회고에는 1950년 6·25전쟁을 치르면서 피를 나눈 두 나라가 완전히 다른 방향을 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점에 대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2002년 12월 23일 국방차관에게 보낸 공문에는 “한국의 대통령 당선인(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관계를 재검토한다고 했는데 ‘좋은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한국인에게 부담을 떠넘길 좋은 기회”라고 적었다. ‘자주’를 기치로 내걸고 동북아 균형자가 되겠다고 했던 당시 한국 정부의 섣부른 외교안보정책이 국방정책 새판 짜기에 나선 미국 네오콘에게 빌미를 제공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

노무현 정부의 요청을 수용해 전 세계 미군의 재배치 차원에서 추진했다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논의의 밑바탕에는 미군의 희생을 고마워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나라에 더 주둔할 필요가 없다는 원초적인 노여움이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럼즈펠드는 “부유한 한국에서는 어떤 상황에도 주한미군은 유지될 것이며 북한이 도발할 경우 추가 병력을 파병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한국의 군대 규모를 축소시키는 불행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했다.

2006년 7월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당시 럼즈펠드 장관이 즉각 요격을 준비시켰다는 부분은 한반도의 안전보다는 미국 본토의 방어가 우선순위에서 압도적으로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숙원사업으로 추진해 오던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실전 테스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물론 ‘북한 미사일이 미국을 향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있었으므로 실제 요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의 도발이 한반도 상황을 예기치 않은 재앙 속으로 빠뜨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2006년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미국은 확장된 억제력을 통해 한반도 핵우산 공약을 구체화했다”고 하자 “정말 그러냐?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네…”라며 묘한 웃음을 지었던 럼즈펠드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는 결과적으로 1주일 후에 중간선거 패배 등의 책임을 지고 쫓겨나듯 퇴진했다. 어쩌면 럼즈펠드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정당화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주요 미 언론도 “자기정당화와 아집으로 가득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미국 한 번 안 가봤다는 것이 무슨 문제며 반미(反美)면 어떠냐”며 집권했던 진보정권과 무결점의 독선주의자 럼즈펠드의 만남은 60년 혈맹을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만큼 파괴력이 컸다는 점은 한미 양국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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