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창규]국가 R&D도 재무장할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국민 혈세를 다 어디에 썼기에 무기체계가 그 모양이냐는 국민의 질타가 거세다. 해군 교관 시절 무기체계를 지원했던 나는 우리 연구개발(R&D) 현실이 떠올라 요즘 잠을 설친다.

우리나라 R&D 예산은 산업에 관련된 것만도 4조5000억 원에 달한다. 전체 R&D 예산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은 3.4%로 일본과 비슷하며 2%대인 미국 독일 프랑스보다 앞선다. 중국은 1.5% 수준이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다. 오히려 좀 많은 듯하다. 고작 대포 몇 문으로 최전선을 지키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연평도의 약점을 우리의 R&D 시스템도 지니고 있는 건 혹시 아닐까.

‘2020년 세계 5대 기술 강국 실현’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국가 R&D전략기획단이 출범한 지 이제 꼭 6개월…. 우선 현장을 알아야겠기에 국내외 R&D 현장을 밤낮 없이 다녔고, 불합리해 보이는 정책이나 제도를 개선하려고 애썼으며, 한국적 스토리를 담은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 계획도 몇 개월 산고 끝에 마련했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R&D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돈을 넣는 대로 바로 결과를 얻는 상품 생산이 아니기 때문인지 R&D 예산은 ‘눈먼 돈’ 이라는 안이한 인식이 퍼져 있어 우선 불안하다. 우리의 특허 건수가 독일보다도 앞선 세계 4위라고 과학기술 순위도 그쯤 되는 걸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도 불안하다. 지금도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가시적 성과를 내기도 힘든 R&D 얘기는 나중에 하자는 정책 입안자들을 보는 것도 심히 불안하다. R&D에 대한 기본상식과 철학도 없는 일부 기업, 연구소, 대학들이 국가예산이나 우선 쓰고 보자는 심산으로 그저 그렇고 그런 기술을 한껏 부풀려 예산 따는 데만 혈안이 돼있는 모습을 간혹 보면 불안감은 더하다.

예산 따서 쓰고 보자는 식 아닌가

얼마 전 생존해 있는 화학자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조지 화이트사이즈 하버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산업 전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인도 이스라엘 등 주요국 정책에 관여하면서 촌철살인의 미래 통찰력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인물이다. R&D 전략기획단이 초빙한 ‘해외자문단’의 좌장 격이다.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우면서도 그의 쓴소리는 당혹스러웠다. 세계적 석학이긴 하지만 명색이 국가 최고기술경영자(CTO)인 나보다 오히려 한국에 대한 통찰력이 앞선 대목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요지는 이랬다. 한국은 기존의 기술을 조합 응용해 제품화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창의적 기술을 오랜 기간 인내하면서 밀고 나가 상품화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문화의 문제이거나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인내심 부족, 장기적 안목의 결핍에다 ‘리스크 테이킹’의 자질까지 부족하다는 말로 들렸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는 다음의 예를 들었다. 태블릿PC의 경우 요구하는 기술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한국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공할 수 있겠지만 스마트 자동차의 경우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이 정보통신과 자동차를 잘한다지만 이들의 결합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업이 절대 아니다. 스마트 자동차 생산기술도 중요하지만 고속도로 교통시스템 등 주변기술 및 인프라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다. 자동차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까지 갖추는 데 최소 25년 정도는 걸린다. 한국이 이 25년을 견뎌내며 투자할 자신과 의지가 있느냐가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교통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스마트한 자동차와 스마트하지 않은 자동차가 자주 충돌할 것인데 그렇다면 빈발하는 교통사고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그는 우스갯소리로 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잘하는 분야가 미래산업 축 돼야


그가 한국에 던진 화두는 두 가지다. 성장 가능성만 고려한 투자는 백전백패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사회적 적합성을 반드시 고려할 것과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난센스를 범하지 말고 한국이 지금 잘하는 것을 축으로 미래 신산업을 선정하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 100%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국가의 R&D 방향 하나 제대로 못 잡아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는지, 지금 당장은 표시나지 않는다고 국가 예산을 ‘눈먼 돈’으로 여기고 중복투자하면서 흥청망청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자성할 일이다. 국가 무기체계도 그러하겠지만 국가 R&D도 철저히 재무장하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오늘 밤부터는 주민이 다 떠난 연평도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오버랩되는 악몽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창규 객원논설위원·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 cghwang@mke.g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