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재승]필수와 선택과목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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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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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요즘 국사가 선택과목이라는 사실이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삶의 화두. 이에 답하기 위해 내 나라의 말과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이견 없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럼에도 나는 이번 논란을 시큰둥하게 바라본다. 선택과목이 필수로 바뀐다고 해서 학생이 얻을 유익이 크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뭘 가르치는지 들여다본 후에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텐데 들여다볼수록 걱정이 돼서 그렇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나라 입시교육은 충실하게 따르지 않을수록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에게는 오히려 유익한 교육이다. 사교육이나 과외를 통해 현 입시제도에 충실할수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두뇌는 화석화되며 일제고사를 통해 학교를 한 줄 세우기 할수록 학생의 창의적인 두뇌는 점점 퇴화된다. 대한민국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국사만 해도 그렇다. 다음 세대가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지난 세대가 남긴 생각의 흔적과 행동의 흔적을 이해하는 일. 그런 점에서 인간의 역사와 철학은 필수과목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국사교과서는 암기해야 할 역사적 사건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것도 성인이 된 후까지 우리 뇌에 남아 있는 양은 3%도 채 되지 않는다.

모두 국사를 배우면 뭐가 변하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설했듯이 역사란 끊임없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다시 쓰이는 수많은 이야기이다. 그것을 고정된 사실처럼 받아들이면 위험하다는 점을 세상에 덜컥 내보내지고 나서야 우리는 깨닫지 않는가?

역사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일, 유적과 사료를 통해 당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는 방법, 세계사 속에서 우리 역사의 의미를 짚을 줄 아는 일 등이다. 그러나 현재 교과과정엔 이런 내용이 별로 포함돼 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 국사교과서 내용은 글로벌 리더를 키워야 할 21세기형 교육에도 맞지 않다. 국수주의나 애국심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 우리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고 함께 상생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서, 우리 교과서는 자국 중심의 역사관을 고취하는 데 머문다.

국가주의에 바탕을 둔 우리 교과서를 공부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한일전에선 이겨 돌아오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야 하는 나라의 충실한 구성원이 된다. 나는 다음 세대가 글로벌 리더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인류애를 가진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교과서가 이에 지침이 되길 바란다.

이런 국사 교육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학생에게 역사란 따분하고 고루한 과목이라는 고정관념을 주어 평생 역사책을 멀리하게 만들까봐 그렇다. 다시 회복될 수 없는 불행만큼 큰 비극도 없다.

대학 역사 수업 때 교수님께선 우리들에게 “내 수업이 해야 할 첫 번째 책무는 너희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역사지식과 왜곡된 역사관, 선입견을 머리에서 벗겨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왜 우리는 학창시절 내내 국사를 수업시간에 배웠으면서도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호기심과 자기 동기로 읽은 역사책 한 권에 감동과 충격을 받는지 곰곰이 성찰해 볼 일이다.

뜻있는 국사교사와 국사학자들이 세계사와 함께 국사를 기술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스스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법을 담은 교과서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념 편향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와 국사 학파 간의 이기주의 등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국사교과서가 개선되지 못하는 실정이란다.

‘죽은’ 교과서는 이제 바꿔야

이 어찌 국사 과목만의 문제라 할 수 있으랴?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과정이 비슷한 병을 앓는 이유는 열악한 교육환경과 한 줄 세우기 정량 평가를 요구하는 대학입시 때문이다. 납량특집 공포영화만큼이나 소름 돋게 만드는 교육방송 수능 강의는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 강의를 보면 공장으로 변한 학교에서 학생을 기계에 집어넣어 소시지로 만드는 영화 ‘더 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라면 심지어 수학도 필수가 아닐수록 유익하리라. 고등학교 수학의 트라우마를 갖지 않게만 해도 그들은 세상에 나가 스스로 수학책 한 권이라도 즐겁게 읽을 테니까.

내 민족, 내 나라를 넘어서 보편적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이해하는 교육이 다음 세대의 필수 과목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평생 스스로 생각하기를 즐기고 지식의 즐거움에 흠뻑 빠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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