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규정대로’ 일본의 힘, 혹은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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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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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예고한 대로 소방점검 요원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는 방과 거실, 부엌 천장에 달려있는 화재감지기를 꼼꼼히 살폈다. 긴 막대기 끝에 달린 열 발산장치를 가까이 대니 화재감지기에서 ‘삐삐’ 소리가 났다. 합격이었다. 한국에서 10여 년 아파트 생활을 했지만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규정 때문입니다.” 전기와 배수관 설비 점검도 이런 식으로 받았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 때의 일이다. 은행 직원은 지겨울 정도로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친 후 도장을 요구했다. 서명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더니, 서양인은 서명해도 되지만 한국 일본 중국인은 도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에 도장보다 더 위조하기 어려운 서명이 안 된다는 건 비합리적이지 않느냐, 더구나 서양인은 되는데 왜 동양인은 안 되느냐고 했더니 대답은 또 간단했다. “규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규정’이란 말은 일본에 살면서 가장 흔히 듣는 단어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가장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점원이나 공무원에게서 ‘규정 때문’이란 말을 들으면 그냥 물러서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조금만 편의를 봐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놓고 “죄송합니다”란 말을 열 번도 더 하고 고개를 90도로 숙이면서도 끝내 해주지 않는다.

아이를 집 근처 학원에 한 과목 수강하러 보냈더니 시험은 세 과목 모두 봐야 한다면서 한 과목 수강료와 세 과목 응시료를 매달 요구했다. 횡포가 아니냐며 따졌더니 학원 직원은 “손님 말도 맞습니다만, 그게 규정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른 사람은 항의하지 않더냐고 물었더니 간간이 있지만 규정을 알려주면 다들 이해한다고 했다. 일본 사람은 ‘규정’ 앞에서는 업자든 소비자든 그냥 승복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는 모양이다.

일본에선 인터넷이나 전화를 신청하면 보통 3주가 걸린다. 신청을 받아 일주일에 한두 번 정해진 요일에 본사로 보내고, 또 정해진 날에 다음 절차를 진행하고….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대리점 직원의 설명이었다. 접수하자마자 인터넷으로 본사에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직원은 “규정이 그래서요”라며 생긋 웃었다.

규정은 이제껏 일본을 떠받쳐온 저력의 한 요소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정확성, 속고 속이지 않는다는 신뢰성, 예측 가능한 업무처리는 모두 규정 준수에서부터 시작되는 미덕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할 만큼 1980년대 말부터 경제침체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세계 2위 경제대국을 유지해온 비결의 하나는 분명 이것일 것이다. 일본 사회가 언제 어디서든 가지런히 정돈된 느낌을 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론 일본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다는 지적도 많다. 맞는 말이다. 그들도 인정한다. 자기들도 답답한 때가 많다고 말하기도 한다.

요즘 일본에선 한국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국인의 유연한 사고와 창의성, 기업의 빠른 의사결정 구조, 심지어 ‘빨리빨리 문화’를 칭찬하기도 한다. ‘창의성의 시대’로 불리는 21세기엔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의 모범답안이 항상 최선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나칠 정도로 규정에 충실한 일본 문화가 ‘양날의 칼’일 수 있는 셈이다. 일본의 ‘규정대로’ 문화가 여전히 힘의 원천이 될지, 아니면 좀 더 빠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지 지켜볼 일이다.

윤종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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