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칼럼]봄날같은 활력, 가을같은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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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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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뒤의 산비탈을 온통 다 덮은 개나리가 만개하자 황금빛이 반사되어 방 안에 가득해진다. 그토록 혹독하게 춥고 길었던 겨울, 심술궂게 봄 길을 가로막으며 훼방 놓던 찬비와 진눈깨비도 다 그치고 마침내 봄이 오는가. 차고 사나운 바다에서 들려온 참혹하고 비통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개나리 황금빛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외출한다. 마을버스에 승객이 혼자뿐인 듯하여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어 펼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기사님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아 개그맨의 웃음소리가 빈 차 안에 낭자하다.

나이 지긋하신 점잖은 신사분이 휴대전화를 귀에 달고 승차한다. 자신의 사장실 안이라는 듯 우렁찬 소리로 통화를 한다. 무슨 제품인가를 창고에서 실어내어 어디 어디로 얼마 분량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어떤 직원을 혹독하게 꾸짖는 가운데 라디오에서 폭소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간다. 그에 비례하여 통화하는 신사의 목소리 또한 높아진다. 잠시 뒤 젊은 여자 분이 내 뒤에서 또 통화를 시작한다. 김치 냉장고에 보관한 김치의 처리문제와 아이 간식에 대한 가정부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번에는 버스의 문 앞에 선 운동모자의 젊은이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 특유의 말로 통화 중인데 사이사이에는 된소리가 섞인 유쾌한 욕설이 박자를 매긴다.

바야흐로 봄빛 환한 마을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통화 중이다. 나는 책읽기를 포기하는 대신 저마다 발산하는 저 엄청난 삶의 활력을 생각한다. 모두가 쉬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외치며 목하 통화 중이다. 카뮈의 소설 ‘전락’의 주인공인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는 훗날 역사가들이 20세기 현대인을 두고 뭐라고 정의 내릴지 상상해 보다가 시니컬한 답을 내놓는다. “그들은 간통을 하였고 신문을 애독하였도다.” 21세기의 우리에 대해 훗날의 역사가들이 정의를 내린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들은 휴대전화로 통화 중이었고 인터넷 접속 중이었다.”

왁자지껄한 기운 덕에 이룬 발전

지하철 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모두가 통화 중이었고 소형 트렁크를 앞에 세운 신사는 목하 간추린 고사성어 사전을 펼쳐들고 목청 높여 강의 중이다. 잠시 후면 또 잇몸 위생을 위한 신약을 싼값에 공급하겠다는 목소리에 이어 휴대용 카세트의 찬송가가 지나가고 이어 ‘이번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의 넓은 간격에 발이 빠지기 쉽다는 안내 방송이 나올 것이다. 방송의 소음을 이기기 위해 휴대전화 통화 목소리는 그만큼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의 왕성한 활력은 청각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 세계 어느 도시에도 지지 않는 광대한 사이즈의 간판, 초강력 원색과 형광색이 애써 설계하여 신축한 건물을 온통 다 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나날이 발전하는 첨단 조명은 또한 얼마나 공격적으로 찬란한가. 도시 전체가 목이 터져라 고함치는 것만 같다.

남의 나라 같으면 식당 입구의 작은 틀 속에 지근거리에서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작고 아담한 글씨로 소개했을 메뉴가 굵직한 먹 글씨로 각종 내장과 소화기관의 이름과 함께 간판 위에 나붙어 손님을 부른다. 우리는 국내 유일의 화강암 돔 건물인 중앙청을 한 방에 날리고 옛 광화문을 신축 중이다. 순간의 분을 못 이겨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을 한순간에 불태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즉각 그 자리에 더 나은 국보로 복원하겠다는 우리 모두의 각오는 그보다도 더 새롭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 이래 여전히 공사 중이다. 돈이 돌고 활력이 돈다. 세종로 거리에 수십 년 동안 우리의 일상을 지켜본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아름다운 뒷산과 궁궐을 가린다고 하루아침에 다 뽑아 버리고 새로운 뙤약볕 광장을 조성한다고 오랫동안 공사 중이더니, 어느 날 돌연 그 자리에 난데없는 겨울스포츠 시설로 산도 궁전도 다 가리는가 했더니, 지금은 그 앞에 싸움하는 장군도 아닌 인자한 대왕께서 황금의 옷을 입으시고 야외의 의자에서 눈비를 맞고 앉아 계신다.

지극히 일부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빠르고 충격적이고 부산스러운 변화는 우리의 꺼지지 않는 활력을 증언한다. 이 활력 덕분에 우리는 초고속으로 여기까지 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이 활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용히 주변 살피는 배려를

그러나 이 봄날 이쯤에서 활력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다운 삶,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사람답게 갖추어야 하는 품격, 그것은 위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내 가족, 내 편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 생활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완결성과 세련미,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정신적 높이를 말해주는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유지해야 할 활력과 동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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