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칼럼]연둣빛 봄을 만드시는 선생님들께

  • Array
  • 입력 2010년 5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저만큼 물러가다가 되돌아와 성급히 핀 여린 꽃잎을 할퀴던 지루한 겨울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천지를 뒤덮는 우리네 5월의 저 연두색이다. 처음, 시작, 출발의 색이 연두색이다. 초록을 향해 지금 막 솟아오르는 마음의 화살표가 연두색이다. 이런 5월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을 늘 행복하게 여긴다. 이제 며칠 뒤면 스승의 날이다. 세상의 수많은 스승 가운데서 오늘 나의 연두색 마음은 두 분의 스승을 떠올린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까운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사하고 할머니와 어머니와 형이 전부인 집안은 참혹하게 가난했다. 담임선생님이 가장 우수한 네 학생을 중학교 장학생 시험에 응시시키기로 결정한다. “중등학교에 가면 모든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기왕이면 너희들처럼 가난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말한다.

여자 둘이서 허드렛일을 해서 근근이 두 아이를 키운 그 집에서는 소년이 다음 해부터는 일을 해서 주급을 받아 올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앞으로 6년 동안이나 집에다가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선생님이 소년의 집을 찾아간다. 소년에게는 밖에 나가 놀라고 이른다. “이해하시겠죠. 제가 이제 저 애 칭찬을 좀 할까 하는데 옆에서 들으면 진짠 줄 알 거란 말이에요”라고 선생님이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 애 칭찬을 좀 할까 하는데요”

소년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현관문 아래서 기다린다. 하늘빛이 초록으로 저물 무렵 선생님이 문을 나설 때 할머니가 과외비를 낼 돈이 없다고 하자 “걱정 마세요. 얘가 이미 다 냈답니다” 하고 선생님이 말한다. 선생님은 정규 수업이 끝난 뒤 소년을 매일 두 시간 동안 붙잡아놓고 공부를 시켰다.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던 날 선생님이 말했다. “네겐 이제 내가 필요 없게 되었구나. 학식이 더 많으신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겠지.” 소년은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 대신에 어린 가슴이 쥐어뜯기는 느낌이었다. 그 합격에 의해 낯선 세계, 모르는 것이 없는 저 선생님을 떠나 낯선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57년 11월 19일, 그때의 어린 소년은 옛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제가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그 당시 가난한 학생이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리고 손수 보여주신 모범이 없었더라면 그런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영예를 지나치게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선생님이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도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드리고 선생님의 노력, 일, 그리고 거기에 바치시는 너그러운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결코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학생이기를 그치지 않았던 한 어린 학동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릴 기회는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소식’, 그 영예란 훗날 작가로 성장한 알베르 카뮈가 그때 막 받은 노벨 문학상을 가리킨다.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스웨덴 연설’은 그래서 은퇴한 초등학교 교사 루이 제르맹에게 헌정되어 문학사에 남았다.

이와 같은 행운이 위대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알베르 카뮈가 옛 스승에게 이런 편지를 쓰던 무렵, 나는 기적처럼 서울의 경기중학교 학생이 되어 있었다. 궁벽한 산골의 농촌 소년이었지만 서울의 중학교 입시를 위해 초등학교 6학년 때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갔다. 6·25전쟁이 막 휴전으로 마감된 시절이라 끼니도 제대로 채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책상도 의자도 없는 교실 마룻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글씨를 썼다.

그곳에서 나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김갑동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모시는 행운을 얻었다. 김 선생님도 매일 정규수업이 끝나면 나를 당신의 집으로 불러 과외수업을 시켰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서울로 진학하려는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과외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경제적 능력도 없었으니 물론 과외비는 없었다. 선생님은 “걱정 마세요. 얘가 이미 다 냈답니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밤이 이슥하면 그 어렵던 시절에 사모님과 선생님의 노모께서 가끔 밤참도 내 오셨다. 그때의 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음을 나는 잘 안다.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해마다 세상이 연두색으로 변하면 스승의 날이 오고 또 그날이 되면 나는 팔순에도 아직 정정하신 김 선생님과 그때 밤참을 차려내 오시던 사모님을 찾아간다. 그때마다 밉고 무시해야 할 사람보다 고맙고 존경할 분이 더 많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고액과외가 당연해진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는 이런 감동적인 선생님이 남몰래 연두색 봄을 만들고 계시리라 확신한다.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