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하진]열 손가락에 꼽아 본 2009

  • 동아일보

글쓰기는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개설된 교양 필수 과목이다. 학문이란 글로 전달하는 것이므로 제대로 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의 중요함이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제대로 쓰기를 가르치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인 편이다. 강의 첫날의 글과 마지막 수업 때 제출한 과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볼 때 이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첫 수업에서 이 학생은 글로 상깨나 받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경우는 당연히 잘 쓰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라고 의심스러울 만큼 중언부언하거나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일절 염두에 두지 않고 써냈던 학생은 시간이 지나 기말이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몇 해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바른 한글 사용법이나 주제의 설정과 진행 방식과 같은, 초등학교 이후 지겹도록 배웠을 자잘한 원칙을 알려주기보다는 나의 생활, 나의 역사, 욕망, 치기, 바람, 기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강의를 진행한다. 이따금 이게 과연 대학의 강의인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조금은 유치한 이야기가 오가지만 학기 초에 무언가 끊임없이 써야만 한다는 부담감으로 얼어붙었던 학생들은 차츰 솔직해지고 용감해지고 그에 따라 글에도 생기가 도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주의 과제는 ‘내가 선정한 2009년의 10대 뉴스’였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참고해서 올 한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이슈를 돌아보자는 취지임을 미리 공지했다. 학생들이 착실하게 뽑아온 뉴스 중 공통적인 내용은 신종 인플루엔자,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미디어법 통과, 조두순 사건, 김수환 추기경 선종, 개기일식, 나로호 발사 실패, 용산 참사, 세종시 수정안 논란 등이었다.

기쁜 일보다 슬픈 일 많았던 한해

또 적지 않은 학생들이 2pm의 재범 탈퇴, 어느 여대생의 루저 발언, 동방신기의 재판, 마이클 잭슨 사망, 고 장자연 씨를 둘러싼 논란 등 연예계에서 일어난 화제를 10대 뉴스에 포함시켰다. 기아 타이거즈의 한국 시리즈 제패, 김연아의 쾌거, 호날두의 이적을 꼽은 학생도 적지 않아 스포츠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 역시 지대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케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의 막걸리 열풍, 만화 ‘짱구는 못 말려’의 작가 우스이 요시토의 사망을 주요 이슈로 꼽은, 예외적인 학생도 있었다.

“고생들 했다. 이제 내 개인에게는 2009년 한 해 어떤 일이 있었나. 각자의 10대 뉴스를 적어보자.” 내 말이 떨어지자 강의실에는 일순 긴장이 감돌았지만 곧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량을 제한하지 않았고 시간 또한 정하지 않았지만 150분의 강의 시간이 다 지날 때까지 학생들은 모두가 진지한 자세로 쓰기에 열중했다.

이윽고 하나 둘, 글을 마친 학생이 강의실을 떠나고 나는 천천히 읽었다. 09학번이 다수인 까닭에 학생들이 가장 중요한 일로 꼽은 내용은 단연 대학 합격이었다. 첫 미팅, 첫 음주, 첫 농활, 첫 MT, 첫 아르바이트, 첫 해외여행, 첫 운전과 같은 생애 처음 겪은 일이 뒤를 이었다. 복학생의 경우에는 전역이 으뜸 화제였으며 남자 혹은 여자친구를 사귀거나 헤어진 일, 고백했다 딱지 맞은 일 등 애정사와 관련된 일도 빠지지 않았다. 학사경고나 장학금을 받았다거나 어학공부와 관련된 일화 등 학내 생활 역시 주요 이슈였다.

또 집안의 경제적인 위기, 할머니 또는 어머니의 죽음처럼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으며 동생과의 싸움, 친구와의 절교, 드라마 서른 편을 한 번에 내려받아 본 경험 등등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휴대전화, 자전거, 반지, 애써 기록한 노트의 분실과 그것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진솔하게 적은 학생도 다수 있었고 이 수업을 들은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아부성 짙은 발언도 있었다. 모 외국 브랜드의 스포츠카 출시를 올해의 중요 이슈로 꼽은 한 학생은 그 자동차가 자신의 드림카인 이유를 자세하게 적었다.

얻은 것-잃은 것, 다시 한번 되새겨

시사에 관한 과제에서 제목만 알고 내용은 전혀 모르던 일이 적지 않았노라고 심각하게 반성하던 학생들은 자신의 10대 뉴스 선정에서는 진지하고도 가벼운, 즐기는 태도로 일관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돌아볼 기회를 가진 점이 학생을 그처럼 몰두하게 했을 거라 생각하니 나 역시 뿌듯한 느낌이었다.

송년회의 계절, 이틀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회식과 모임에서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그리고 지쳐가는 이 시기, 나와 내 가족, 주변의 이들과 함께 우리의, 나만의 10대 뉴스를 선정해보면 어떨까 싶다. 잊고 있었던 일,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지인의 아픈 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준 말, 행동…. 그리고 그는 알지 못하나 커다란 위안이 되었던 일…. 하나씩 되새기며 무엇을 얻었고 또 무엇을 잃었는지 혼자서, 스스로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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