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여권 실세의 ‘양반론’

  • 입력 2001년 10월 8일 19시 17분


며칠 전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

“김대중 정부를 남은 1년 6개월 동안 흔들어서 망하게 하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김대중 정부가 크게 부정한 것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전(前) 정권의 1년 6개월 전하고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지금은 훨씬 양반이다. 우리는 스캔들 사건이 많지만, 그 사건이 다 별 볼일 없이 끝난 것 아니냐. 이용호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야당은 이걸 호남게이트로 만들려고 한다. 검찰 내 호남인맥, 국세청 내 호남인맥 이런 사람들이 짜고서 한 사건으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 그래서 국정조사 하자는 것이다. 국정조사하면 증인으로 불려나온 사람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말하고 그럴 것 아니냐. 그러나 그렇게 지역을 나누면 정말 큰일난다.”

그러잖아도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은 K라느니, KK라느니 의혹이 질펀한 터에 ‘고위 관계자’는 또 누구냐고 하실 분이 있겠다. 하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한 약속은 지켜주는 것이 도리인즉 익명(匿名)은 어쩔 수 없다. 살짝 귀띔을 한다면 ‘꽤 센 사람’이다.

그의 말을 따져보자. 우선 김대중 정부를 남은 1년 반 동안 흔들어서 망하게 하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억하심정이 아니고서야 이 정부가 망하기를 바라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이 다시 분노로 바뀌었을망정 정부가 망하면 그것은 바로 나라가 흔들리는 것인데 그걸 좋다고 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언의 핵심은 ‘흔든다는 것’일진대 그를 비롯한 집권측은 여전히 야당과 일부 언론이 ‘작당’을 해서 이 정부를 흔들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심각한 문제는 집권측의 이런 의심이 ‘옷로비 사건’ 이래 ‘중증(重症)’이 되어왔다는 데 있다. 2년 전 ‘옷로비 사건’이 터졌을 때 집권측은 ‘실패한 로비’를 놓고 언론이 ‘마녀 사냥’을 한다고 했다. 몇몇 신문이 실체도 없는 사건을 부풀려 정부를 악의적으로 흔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집권측은 왜 많은 사람이 ‘옷로비 사건’에 그토록 실망하고 분노하는지를 제대로 알려들지 않았다. ‘실패한 로비’라는 논리만 내세웠지 믿었던 정권의 도덕성에 배신감을 느낀 국민의 감성은 헤아리지 않았다.

‘이용호 게이트’가 여권의 희망대로 ‘몇몇 썩은 검찰 인사들과 사기성 강한 금융업자로 인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사건’으로 ‘별 볼일 없이’ 끝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니 흔들지 말라고? 이건 참 경우에 맞지 않는 소리다. 그들이 야당이라면 수사 결과를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겠는가. 더구나 야당이 안 떠들고 신문이 보도를 안 했으면 검경(檢警) 지휘부까지 연루된 사건 자체가 슬그머니 묻히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작당을 하느니, 흔드느니 불평부터 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이용호 게이트를 호남 게이트로 만들면 안 된다. 그렇게 지역을 나누려는 것은 잘못이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영남정권이 37년간 ‘해먹었다고’ 영남사람 모두가 수혜자가 아니듯이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끼리끼리 커넥션’이 호남인맥이라고 해서 호남사람 모두를 싸잡아 편가르기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지역주의에서 덕을 보는 자들이란 대체로 지역 감정을 부추겨 특혜를 누리는 일부 정치인과 이들에게 줄을 대는 소수의 관료, 기업인이다. 절대 다수 민중이야 그들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남이가 식’ 허위의식에 공연히 헛배만 불려온 게 아니던가.

하지만 여권 고위 관계자가 편가르기를 탓하는 것은 듣기에 민망하다. 이렇게 된 데는 집권측이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은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의 말처럼 ‘권력의 사유화(私有化)’에 있다. 권력을 공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사적으로 고향 사람, 학교 후배를 밀어주고 요직에 골라 앉히는 풍토에서는 유별나게 사기성이 강하지 않더라도 지연(地緣) 학연(學緣)을 찾아 줄을 대려 하기 마련이다.

비공식 라인의 권력이 힘을 발휘하는 한 이런저런 게이트는 없어질 수 없다. 비공식 라인의 힘이 여전하다는데도 여권 고위 관계자는 ‘전 정권에 비해 양반’이라며 자위하고 있는 듯 하니 딱한 노릇이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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