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전설의 여기자…오리아나 팔라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2일 14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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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⑧

이탈리아 아가씨 소피아는 지중해의 큼직한 섬 시칠리아 출신이다. ‘시칠리아(Sicilia)’는 영어로는 ‘시실리(Sicily)’라 불리는데 소피아는 외국인으로부터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으면 ‘시칠리아’라고 대답한다. ‘시실리’라고 하면 으레 ‘마피아 본산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만난 ‘지리 바보’들은 ‘피렌체’와 ‘플로렌스’, ‘베네치아’와 ‘베니스’, ‘토리노’와 ‘투린’이 같은 도시인 줄 모른다. 어찌 그들만 탓하랴. 유럽엔 온갖 잡탕 언어가 동시에 쓰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안트워프, 안트베르펜, 앙베르…. 벨기에의 이 항구도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소피아는 이탈리아 본국인과 얘기할 때도 출생지를 되도록 밝히지 않으려 애쓴다. 생일이 고약하다. 1992년 5월 23일.
이탈리아 본토인들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잘 안다. 마피아 소탕에 나선 ‘국민 영웅’ 지오반니 팔코네 검사가 마피아에 의해 폭사한 날이었다. 그날 팔코네 검사는 시칠리아 팔레르모공항에서 시내로 가던 중 고속도로에 장치된 다이너마이트 폭발 때문에 아내, 3명의 경호원 등과 함께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팔코네의 절친한 친구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도 마피아를 수사하다가 2개월 후 역시 폭사했다.

팔코네, 보르셀리노 등 거물 수사 책임자가 두 달 사이에 살해당한 것은 이탈리아 정부로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의 치밀한 수사력에 의해 마피아가 궁지에 몰렸음을 반증한다. 이들은 체포된 마피아 조직원을 설득하여 조직의 비밀을 털어놓도록 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마피아는 붙잡힌 조직원이 입을 다물면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가족에게 생활비를 대준다. 그러나 입을 열면 가혹한 연좌제 보복을 가한다. 살바토레 콘토르노란 조직원은 30여 명의 친척이 보복살해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탈리아 국민은 보르셀리노 검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스칼파로 대통령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정부는 장례식에 즈음해 공수부대원 등 2000여 병력을 시칠리아에 급파했다. 마피아와 한판 전쟁을 치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팔레르모 교도소에 수감됐던 마피아 중간보스 55명을 육지의 중죄인 수용소에 분산 수감하고 몇몇 거물급 두목은 외딴 섬으로 보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아기를 낳은 소피아의 어머니는 산후조리가 끝나자 짐보따리를 쌌다.
“마피아 소굴에서 천사 같은 내 딸을 키울 수 없어요. 친정인 나폴리로 가겠어요.”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하며 신발을 신자 아버지도 엉거주춤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미워도 내 고향’인 시칠리아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으나 나폴리의 처가가 밥술깨나 뜨는 집안이므로 차라리 처가살이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버지는 장인의 도움으로 신문, 책, 문방구 등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

소피아는 나폴리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꿈 많은 어린 시절에 품은 장래 희망은 패션모델, 만화가, 연극배우 등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모델이 되기엔 목이 너무 굵었고, 쪼그리고 앉아 중노동에 가까운 그림 작업을 하는 만화가가 되기엔 청춘이 아까웠고, 암기력이 나빠 대사를 외울 자신이 없어 연극배우도 포기했다.

소피아는 중학생 때인 2005년 6월 9일 아버지와 함께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축구 영웅 마라도나를 먼발치에서 보았다. 마라도나는 옛 동료 치로 페라라의 은퇴경기를 보러 나폴리로 돌아온 것이다.
소피아는 마라도나를 육안으로 봤다는 감격과 술 마시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어른 관람객들의 무질서한 관전 태도 등을 아우른 관람기를 작성해 나폴리 지역신문에 보냈다. 그 글이 신문의 독자투고란에 제법 큼직하게 게재됐다. 교장 선생님은 소피아를 교장실에 불러 칭찬했다.
“글을 참 잘 썼더구나! 오늘 학교 파하면 우리 집에 놀러가지 않을래?”
교장 선생님 댁에 초대 받다니! 옆에 선 담임선생님도 연신 싱글벙글한다. 교장 선생의 차를 타고 댁에 갔다. 거기엔 교장의 친정어머니가 와 계셨다.

“엄마! 글 잘 쓰는 학생이 있어 데려왔어요.”
소피아의 눈엔 교장도 할머니인데 그녀의 어머니라니! 왕할머니는 허리가 꼿꼿하고 피부도 탱탱했다. 왕할머니는 20대부터 기자를 했고, 지금 70대인데도 프리랜서 기자, 소설가, 시인으로 활동한단다.
“젊은 학생을 보니 나도 젊어진 기분이네!”
“70대라고 아무도 믿지 않겠어요. 저희 어머니 세대같이 보이는데요.”
왕할머니는 아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 입이 벌어졌다.
“학생이 내 이름은 듣지는 못했을 것이고… 오리아나 팔라치, 들어봤겠지?”
“물론이죠. ‘전설의 여기자’ 아닌가요. 부끄럽게도 그분이 쓴 글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왕할머니는 팔라치와 어린 시절 피렌체에서 자랄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란다. 어른이 되어 글을 쓰는 직업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더욱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다고 한다. 팔라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녀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거물들과 인터뷰할 때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언쟁을 벌여서라도 상대방의 내면세계를 파헤친단다.

“오리아나를 소개해주랴?”
“예?”
소피아는 귀를 의심했다. 나폴리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녀에게 ‘살아있는 전설’을 소개하다니 어디 가당키도 한 말인가.
“그런 분과 접촉하면 소피아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영어 속담에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이 있지? 이제 시대가 바뀌었어. ‘소녀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소피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왕할머니를 응시하며 관심을 보이자 왕할머니는 신이 나서 옛날 일화를 풀어냈다.
“오리아나는 192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빠듯한 살림에도 총명한 딸을 위해 책을 엄청나게 사주었지. 거실이며, 안방이며 온통 책으로 그득했지. 나도 그 집에 가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었지. 그 아버지는 파시스트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였는데 어린 오리아나에게 총 쏘는 법, 사냥하는 법도 가르쳤단다. 오리아나는 어른 요원들에게 수류탄과 총을 갖다 주는 일을 도왔지.”

왕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9시까지 이어졌다. 소피아가 아버지에게 교장 댁에 간다고 말해 놓았기에 아버지는 소피아를 데리러 차를 몰고 와 교장 댁 앞에서 기다렸다.
왕할머니가 준 팔라치에 관한 책 2권을 집에 가져온 소피아는 주말 내내 그 책을 읽느라 세수할 시간도 없었다. 팔라치의 인터뷰 묶음책인 <역사와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20세기 역사의 거물들!
소피아는 아라파트, 브란트, 키신저, 등소평, 바웬사 등 인터뷰이(interviewee)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리아나 팔라치의 삶을 공책에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워드 작업 대신에 손으로 일일이 썼다. 소피아는 오리아나에 빙의되어 마치 자신의 일기를 쓰듯 몰입했다.

팔라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피렌체 의대에 진학한다. 암기 위주인 의학공부에 흥미를 잃었을 때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다. 그녀는 학업을 중단하고 ‘소녀 가장’으로 가족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피렌체의 작은 신문 ‘일 마티노 델리탈리아 센트랄레’라는 신문사를 무작정 찾아가 기자로 채용해달라고 졸랐다.

편집국장은 시험 삼아 취재 과제를 주었다. 신장개업한 나이트클럽에 관한 르포를 써내라고 한 것. 그녀는 그 르포에서 2차 대전 직후 여름을 맞은 이탈리아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호평을 받았고 곧 사건기자로 채용된다.

오리아나는 기사를 예술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예를 들어, 피렌체의 비둘기를 묘사할 때면 화려한 과거를 뒷전에 두고 현재 쇠락한 피렌체의 역사에 비둘기의 운명을 빗댔다. 그녀의 글은 무미건조한 기사가 아니라 치열한 지적(知的)인 논의였고 심미적(審美的)인 에세이였다.

그녀가 유명한 시사잡지 <레우로페오(L'Europeo, 유럽인)>에 투고한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다뤄지기도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그녀는 이 잡지의 기자로 스카우트된다. 여기서 그녀는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한다. 헐리우드 영화배우를 인터뷰하며 그들의 내면세계를 파헤친 글이 돋보였다.
버트 랭커스터, 킴 노박 등 당대 인기배우를 만났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만나지 못했다. 숱하게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리아나는 이 실패기를 기사로 썼다. 먼로의 단골 레스토랑 12곳, 영화관 8곳, 나이트클럽 18곳을 찾았으나 허탕을 쳤다. 먼로의 집 주소를 알아내 찾아갔으나 이사한 후였다. 이 기사에서 주인공은 기자 자신이 된 셈이다. 기사 마지막을 ‘마릴린씨, 시간이 나면 저를 만나러 밀라노로 와주세요’라고 재치 있게 마무리했다.

할리우드 영화인 인터뷰집 <할리우드의 7개 죄악>이란 책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이제 무대를 더욱 넓혀 1960년부터는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관심사는 ‘고리타분한 습속 때문에 고통 받는 여성’이었다.

베트남전쟁이 터지자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에 쫓아가 목숨을 걸고 취재한다. 회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베트남으로 갔고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와 함께 기사를 보냈다. 그녀의 생생한 전쟁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잡지는 나오자마자 매진되었고 그 기사는 세계 각국의 신문, 잡지에 전재되었다. 이 때문에 ‘투사 여기자’란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1968년 9월 멕시코올림픽 대회에서 ‘투사’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멕시코 정부는 헐벗고 굶주린 국민을 외면한 채 올림픽 준비에 거액을 쏟아 부었다. 오리아나는 반정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현장에 갔다가 등과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그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 병원 침대에 누운 채 구술(口述)로 간호사에게 ‘내가 다친 유혈의 밤’이라는 기사를 받아 적게 했다.
‘멕시코는 베트남보다 더 잔인했다. 전쟁은 무장한 인간끼리 싸운다는 공평한 전제 아래 성립된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비무장 시민을 총살했고 탱크로 깔아뭉갰다.’
이 기사 덕분에 멕시코 저항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다.

오리아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적 틀에 얽매이기 싫어했다. 그래서 자유롭게 여러 남자와 사랑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공개된 연인은 그리스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알렉산드로스 파나고울리스. 그는 1968년 그리스 독재자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좁은 독방에 42개월 동안 수감됐다. 그러다 ‘국외 추방’ 조건으로 석방됐다.

1973년 8월 오리아나는 파나고울리스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강인한 정신력에 매료됐다. 세 살 아래인 그와 오리아나는 연인이 되어 이탈리아에서 함께 살았다. 1974년 여름에 그리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세워지자 파나고울리스는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 국회의원이 된다. 새로운 민간정부의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하던 그는 1976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오리아나는 잡지사에 사표를 던지고 피렌체로 내려가 파나고울리스와의 사랑을 기록한다. 그 남자처럼 42개월간 좁은 골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그 기록은 <한 남자(Un uomo)>란 책으로 출판됐다.

누구에게도 겁내지 않는 그는 인터뷰 때마다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복싱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를 인터뷰할 때 알리가 수박을 먹으며 트림을 3번이나 하자 마이크를 그의 얼굴에 던지기도 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호메이니 옹(翁)을 만나 여성에게 왜 차도르를 입히느냐고 질문하자 발끈한 호메이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경호원들이 오리아나를 끌어내려 할 때 그녀는 이란어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외간 여자에게 손을 대는 남자는 손목이 잘리오. 당신들은 손목이 잘리고 싶소? 호메이니 옹을 다시 모셔오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꼼짝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오랫동안이라도 기다릴 테니 요강이나 갖다 주시오!”
여자 경호원이 없어 남자 경호원들은 쩔쩔 맸고 결국 호메이니는 이튿날 인터뷰 시간을 주기로 약속했다. 오리아나는 호메이니와 인터뷰하려고 이란어까지 배웠다.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베트남 전쟁은 어리석은 전쟁이었다’고 자백하게끔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을 두고 그녀와 인터뷰한 것을 후회했다.
리비아의 권력자 카다피가 약속 시각보다 2시간 늦게 나타났을 때에는 읽던 책을 비서에게 내동댕이쳐 항의했다.

소피아는 오리아나의 삶을 정리한 이 공책을 들고 왕할머니를 다시 찾아갔다. 왕할머니는 손수 만든 전통과자 까놀로를 먹어보라고 권하고는 공책을 훑어봤다.
“아주 잘 요약했네! 오리아나의 후계자가 될 자질이 엿보이는구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걸요.”
“엊그제 오리아나와 통화했단다. 지금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두문불출한다는구나. 소피아, 네 이야기를 했더니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더라.”
“제 목소리를요?”
“물론이지. 이 참에 지금 전화를 걸어볼게.”
왕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오리아나를 불러냈다.
“오리아나! 네 어릴 때 모습 닮은 그 소녀 소피아가 왔어. 전화 바꿔줄 테니 잘 지도해줘!”
소피아는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소피아? 반가워요!”
“영광입니다!”
“그런 인사치레는 권력자 앞에서나 하는 말이야. 나에겐 그냥 반갑다, 즐겁다, 이런 말을 쓰면 돼.”
“앞으로 인터뷰하고 싶은 인물은 누구인지요?”
“북한의 김정일… 그러나 내 건강이 좋지 않아 성사될지 의문이야. 소피아가 내 소망을 대신 이루어주면 좋겠어.”
“막막합니다. 훗날 김정일 인터뷰를 하려면 지금부터 무얼 준비해야 할까요?”
“한국어를 배우면 좋겠네.”

소피아는 한국어교본을 사서 독학했다. 인터넷으로 한국어 강습을 들었으며 한국방송도 시청했다. 한글을 읽고 한국어로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돼 왕할머니에게 자랑하러 갔다. 언제나 밝은 표정의 왕할머니는 소피아를 보자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리아나가 천국으로 갔다는구나!”
2006년 9월 15일의 일이었다.

소피아는 여고생 때 여러 신문, 잡지에 투고했다. 나폴리 지역 신문의 독자투고란 단골 필자로 소피아와 쌍벽을 이루는 로베르토란 소년 문사(文士)가 있었다. 둘이 만나보니 동갑내기였다. 로베르토의 아버지는 검사였는데 마피아에게 살해당했단다. 로베르토는 소피아와 흉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해지자 장래 목표를 털어놓았다.
“마피아를 뿌리 뽑을 테야. 그러기 위해 우선 내가 마피아 조직에 위장 가입할 거야.”
“마피아라면 나도 지긋지긋해. 내가 태어나던 날, 팔코네 검사가 마피아조직에 의해 폭사했다는구나.”

소피아는 고교를 졸업하고 볼로냐대학에 진학해 언어학을 전공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헤치려면 상대방이 구사하는 언어를 분석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볼로냐대학의 교훈은 ‘Alma mater studiorum(모든 학문이 퍼져나간 곳)’이다. 소피아는 교훈이 주는 자부심을 가슴에 품고 독서에 몰두했다.
한국어를 익히는 일은 계속됐다. 2011년 12월 17일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이 사망하는 바람에 그를 인터뷰하겠다는 목표는 상실됐다. 권좌를 물려받은 김정은이 등장하자 인터뷰 목표 대상자를 그로 바꾸었다.

소피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마로 상경했다. 오리아나 팔라치처럼 신문사를 무작정 찾아가 기자로 일하고 싶다고 졸랐지만 통하지 않았다.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해야 했다. 10건의 글을 써서 투고하면 1~2건 채택되는 수준이었고 원고료 수입도 변변찮았지만 글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꿈 때문에 행복했다.

대도시 로마에 오니 다행인 점은 한국식당이 많아 종업원으로 일하기에 좋았다. 한국어로 손님을 모실 수 있는 이탈리아 여성이니 환영 받았다. 소피아는 한국인 손님이 찾아오면 한국어로 대화하며 회화 실력을 연마했다.
한국인 손님들은 소피아에게 한국에 와서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크리스티나 콘팔로니에리처럼 활동해보라고 권유했다.
“크리스티나는 한국에서 유명 방송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어요. 아가씨도 한국에 오면 단박에 스타가 될 텐데….”

소피아는 어느 한국인 손님이 놓고 간 <소설 개마고원>이란 장편소설을 읽으며 김정은을 만났을 때 무얼 질문할까, 하고 구상했다. 그 소설에는 ‘북한 지도자’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한국에서 온 기업인 장창덕을 개마고원에서 만난다. 장창덕은 북한의 살 길은 개방임을 강조하고 한국과 평화공존을 도모하라고 촉구한다. 한국 대통령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두 사람이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이지만 그럴 듯해서 소피아도 김정은을 만나면 그 제언을 던질 것임을 다짐했다.

소피아는 한국식당 사장 P씨가 급하게 한국으로 간다며 전화를 걸어왔기에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식당 열쇠를 자신이 갖고 있기가 부담스러워 퇴근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으로 가서 열쇠를 사장에게 전하려 했다. 자취방이 공항 부근에 있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공항에 내려 탑승절차를 밟는 곳으로 가서 P씨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로마 발 인천 행 비행기를 타려는 한국인들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왁자지껄 떠들며 몰려들었다.

“앗! 저 사람은 김정일?”
소피아는 수하물 카운터 앞에 선 중년 남자가 눈에 띄자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작달막한 키, 곱슬거리는 머리칼, 짧은 목, 검은 선글라스…. 만약 김정일이 사망하지 않고 서방세계로 극비리에 망명 나와 이렇게 나타난 것이라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소피아는 ‘세계적인 특종’을 꿈꾸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피아는 그 남자 옆으로 부리나케 다가가 한국어로, 딴엔 북한 사투리로 말을 걸었다.
“혹시 김정일 동무 아닙네까?”
소피아의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남자는 잠시 눈을 멀뚱거리더니 대답했다.
“아가씨, 한국말 어디에서 배웠어요?”
“조선말을 어디서 배운 게 뭐 대수입네까? 김정일 동무인지 아닌지 대답해 주시라요.”
“와! 이탈리아 아가씨가 북한말, 정말 잘하네요! 나도 북한말 해 볼까요? 내레 왕년에 별명이 똥자루라고, 김정일 닮았단 소리 듣곤 했수다만… 이태리에 와서리 그 소리 들으니 엉이(어이)없습네다.”
소피아는 무안해서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하도 닮아서 제가 실수를 했네요.”
“제가 나폴리에 가서는 마라도나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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