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로버트 파우저]한국인 이름 영어표기와 정체성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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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예전 일본 교토대 교수로 있을 때 ‘회생(回生)’이라는 신기한 단어를 배웠다. ‘학년생’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도쿄대에서 사용하는 ‘년생(年生)’을 쓰는데 교토대에서는 왜 이 단어를 쓸까 궁금했다. 문의한 결과 학업 기간보다 학업의 경험에 중점을 두려고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체성을 지키려 하고 그것을 언어 행위로 표현하려는 교토대가 줏대 있게 생각되었다.

알기 쉽게 ‘성 이름’ 순서대로 했으면

한국에 온 뒤 4년이 지난 지금, 언어 행위를 통해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거듭 생각하게 된다. 아쉽게도 한국의 대학사회는 미국 표준에 맞춘다고 정체성을 뒷전에 두고 있어서 고유한 학교 문화를 발전시키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학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그렇다. 국가 차원에서는 가상의 ‘글로벌 스탠더드’, 지역 차원에서는 ‘강남 스타일’에 맞춰야 하는 게 현실이다.

언어 행위도 마찬가지다. 늘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인들이 이름을 로마자(유럽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알파벳 26자)로 표기할 때의 이름 순서다. 많은 한국인의 명함 뒷면에 적힌 로마자 성명은 서양식으로 ‘이름 성’ 순서로 표기돼 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Gil-dong Hong’ 또는 ‘Kil-dong Hong’으로 적는다. 성과 이름의 순서는 정체성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성 이름’ 순서는 한국인의 고유한 문화 중 하나다. 중국이나 일본도 ‘성 이름’ 순서를 사용한다.

나는 한국인들이 영어 표기를 할 때도 ‘성 이름’ 순서대로 했으면 좋겠다. ‘홍길동’을 ‘Hong Gildong’(또는 Hong Gil-dong)으로 표기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름 순서를 왜 ‘영어식’으로 하느냐고 물으면 “외국 사람은 모르니까”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것이 과연 정체성을 버릴 만한 이유가 될까? ‘성 이름’ 순서를 그대로 지켜도 외국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외국인 이름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를 바꿔 생각해보면 된다. 필자의 경우 ‘로버트 파우저’는 ‘Robert Fouser’의 한글 표기다. 한국어로는 영어의 ‘이름 성’ 순서대로 ‘로버트 파우저’로 표기하며 이를 ‘파우저 로버트’로 표기하는 것은 어색하다. 이것 역시 정체성 때문에 그렇다. 주변 한국인들이 필자를 ‘로버트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나는 참고 넘어가거나 혹은 부드럽게 이름 순서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성 이름’ 순서로 표기할 때 성 뒤에 쉼표를 놓는 경우도 많이 봤는데 이 역시 불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어에 없는 개념을 굳이 새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여기에 깔린 발상 역시 “외국 사람은 모르니까”인데 이것도 정체성을 버리는 행위다.

일상의 습관이 언어 정체성 만들어

한국에서 정체성 논의는 아쉽게도 민족주의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건전한 논의에 지장이 된다. 국어사전을 보면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가장 중시하는 사상’으로 정의돼 있다. 근본적으로 정치적 사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늘 마음속에 있는 ‘한국적 성질’인 셈이다. 이런 한국적 성질은 일상의 민습(民習)에서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작은 습관들’이 한국인을 만드는 것이다. 민습을 버리면 민족이 없어질 것이다.

세계를 휩싸는 거센 ‘세계 표준화’의 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매우 소중하다. 성과 이름의 순서처럼 한국 고유의 언어 정체성을 지켜가는 노력도 작지만 소중하다. 동북아시아의 각국은 정체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표준화가 되지 않아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오늘 한글날에 일상의 언어행위 속에서 한국인으로서 지녀야 할 정체성을 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단단한 대나무처럼 말이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국인#이름#영어표기#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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