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정래]교실이 무너지는 3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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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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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김정래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가르치면서 체험한 중요한 사실은 학생들은 냉정하고 자기 이익이 되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사유로 부실하게 수업하거나 부득이 수업을 못하게 되면 그때는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지만 학기말에 가서 이를 놓고 냉정하게 교수를 평가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선택이 반드시 자신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업 내용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은연중에 꼼꼼히 따져본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배우는 학생이 가외(可畏)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원강사에게만 사은 선물” 충격

며칠 전 스승의 날에 사은(師恩)의 선물을 드리고 싶은 대상이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학원 강사라는 동아일보 보도(5월 14일자)는 충격적이다. 이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필자의 체험이 다른 양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학교와 달리 학원에서는 수업을 빼먹는 일도 없으며, 장기적이건 단기적이건 배우는 학생들의 이익을 정확하게 집어내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열심히 가르치는 적지 않은 초중등학교 교사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학교와 학원의 양자 구도에서 학습자의 선택과 이익에 부합하는 정도가 심하게 학원 선생님들에게 쏠리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세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학교 교육에서는 경쟁체제가 극히 제한되거나 금기시돼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도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교사들 상호 간의 경쟁체제는 교원평가가 근 20년간 답보 상태에 있어 ‘잘 가르치려는 의욕’이 매몰되어 있다. 또 학교 간의 경쟁체제는 이른바 ‘평준화’ 정책에 의해 실종됐다. 평등을 실현하고 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평준화 정책은 지역 간, 계층 간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사교육 쏠림 현상을 야기하는 모순된 정책이다. 또 학교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노예제도와 유사한 평준화 정책에 면역돼 있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도 평준화 정책의 폐지를 주장하는 대신에 ‘보완’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선택권을 박탈하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대신에 ‘보완’해야 옳은가.

둘째, 공부를 시키지 않는 풍토를 조장하는 학교의 지식교육 경시 풍조를 들 수 있다. 흔히 험악한 세태를 핑계로 인성교육을 위하여 지식교육을 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지식과 기능밖에 없다. 인성을 따로 떼어 가르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따라서 인성을 올바로 가르치려면 지식을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학교 교육에 그리고 학교 선생님에 대한 실망의 발로는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왜 이지경 됐나” 교육계 반성해야

셋째, 21세기는 열린 시대니, 복잡계의 시대니, 융합의 시대니 하면서 학교 교육은 산업혁명 이후의 패러다임을 답습하는 데 머물고 있다. 이런 단순계 체제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 욕구를 수용하는 데 학교는 역부족인 데다가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하여 결코 ‘튀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한 분출구인 대학입시 난관을 해결해 주는 데서도 학교는 학원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체제에서 학생과 학부모 자신들의 교육 욕구 분출을 용이하게 해주는 학원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이번 보도로 확인됐을 뿐이다. 또 모든 사은을 뇌물로 보는 교육 당국의 ‘줄기찬’ 행정지도도 학교 선생님들의 의욕을 무력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교육 현실의 타개책은 당연히 이 세 가지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김정래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스승의 날#학교#교육#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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