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함께 볼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4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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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져요. 이건 확신의 미소예요.”

지난해 7월 20일 전맹 시각장애인이자 서울 맹학교 교사인 이진석 씨(45)와 함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오감’ 전시실을 함께 살펴보던 때였다.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배치된 ‘사유의 방’처럼, 이 전시실엔 실제 유물 크기와 재질을 그대로 재현한 불상 모형 두 점이 놓여 있었다.

손끝으로 불상 모형을 어루만지던 이 씨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두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같아 보여도 실은 달라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발끝엔 힘이 들어가 있어요. 확신에 찬 듯해요.”

전맹 시각장애인이자 서울맹학교 교사인 이진석 씨가 지난해 7월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오감’ 전시실에서 실물과 동일한 크기와 재질의 ‘반가사유상’ 모형의 얼굴을 만져보고 있다. 동아일보 DB


그의 말을 듣고 불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제야 두 불상의 차이가 보였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발끝은 온몸에 힘을 실은 듯 하늘을 향해 솟은 반면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온몸에 힘을 푼 듯 발끝이 평평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여태 이 차이를 몰랐다”는 나의 말에 이 씨는 “때로 다른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앞으로 이 전시실을 비(非)장애인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박물관은 ‘오감’ 전시실 개관 전부터 이 씨 등 시각장애인과 협업해 전시실의 미래를 함께 그렸고, 이 씨의 제안을 적극 반영했다. 올 2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 ‘여기, 우리, 반가사유상’을 선보인 것. 나와 이 씨가 경험한 것처럼 앞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함께 반가사유상을 만지고 본 뒤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식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오감’의 방문객 수는 지난달 24일 관람객 1000명을 넘어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배리어프리 전시실 ‘오감’에서 관람객들이 반가사유상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을 손끝으로 느껴보고 있는 모습. 지난달 24일 ‘오감’을 찾은 관람객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의 배리어프리 전시실 ‘오감’에서 관람객들이 반가사유상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을 손끝으로 느껴보고 있는 모습. 지난달 24일 ‘오감’을 찾은 관람객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흔히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장벽을 없앰)’라고 하면 ‘장애인만을 위한 서비스’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 전맹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 씨(55)는 배리어프리라는 말이 지금처럼 널리 퍼지기 전인 1990년대부터 미술관 문을 두드린 사람 중 하나다. 그저 사랑하는 연인과 미술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그는 1995년 무렵부터 일본 미술관 곳곳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렇게 요청했다고 한다.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상관없다” “한 번만 부탁한다”는 말로 끈질기게 미술관 직원을 설득한 끝에 기어코 “그럼 오세요”라는 답변을 얻어낸 것.

시라토리 겐지(가운데)와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의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 미술관 에듀케이터 다키가와 오리에가 가자마 사치코 씨가 ‘디스림픽 2680’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다다서재 제공
시라토리 겐지(가운데)와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의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 미술관 에듀케이터 다키가와 오리에가 가자마 사치코 씨가 ‘디스림픽 2680’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다다서재 제공

그렇게 전화 한 통으로 예기치 못한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림 속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그림 속의 빛은 따뜻한가요?” 쏟아지는 시라토리 씨의 질문을 받아든 미술관 직원들은 그제야 그림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림 속 여자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빛은 기쁜지 슬픈지, 눈동자 속엔 빛이 있는지 없는지….

그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말로 작품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 직원은 그에게 작품을 설명하다 여태껏 호수인 줄 알았던 작품 속 배경이 어쩌면 들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고 한다.

그를 위해 시작한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뜻밖에도 미술관의 시야를 넓힌 것이다.

시라토리 씨가 개인적으로 요구했던 그 배리어프리 서비스는 오늘날 미술계의 화두가 됐다. 1998년 도쿄도 미술관에서 그를 연사로 초청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기 위한 워크숍’을 연 것을 시작으로, 2년 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모임 ‘뮤지엄 액세스 그룹 MAR’이 만들어졌다.

요즘엔 일본 미술관 곳곳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 역시 ‘모두의 박물관’을 기조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진 박물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 씨(가운데)와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 씨(오른쪽)가 시오야 로타의 작품 ‘태도’를 함께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작품을 ‘바지락’ ‘바다코끼리’ 등으로 표현했다. 다다서재 제공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 씨(가운데)와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 씨(오른쪽)가 시오야 로타의 작품 ‘태도’를 함께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작품을 ‘바지락’ ‘바다코끼리’ 등으로 표현했다. 다다서재 제공

2019년부터 시라토리 씨와 함께 일본 곳곳의 미술관을 탐방한 비장애인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 씨(53)는 저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지난해 10월)에서 시라토리 씨와 함께 작품을 감상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줘요.”

두 사람이 함께 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 홀로 반가사유상을 감상했을 땐 미처 보지 못했던 ‘확신의 미소’가 시각장애인 이 씨와 함께 작품을 본 뒤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함께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열리는 세계일 것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소소칼럼#국립중앙박물관#오감#전시실#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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