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허재 감독,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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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일 11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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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허재 감독. 사진공동취재단
경기 중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허재 감독. 사진공동취재단
이탈리아의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쓴 '쿠오레'는 아동문학의 명작이다. 국내에서는 '사랑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돼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 파도바의 애국소년 이야기가 있다. 서커스단에 팔려간 고아 소년의 이야기로, 외국인들이 조국 이탈리아에 대해 욕하는 것을 듣고는 그들에게서 받았던 돈을 내동댕이치는 장면이 나온다.

동전 한 닢이 아쉬운 고아 소년이었지만 조국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을 향해 동전을 뿌림으로써 강력하게 항의한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스타들 중에서도 이 '파도바의 애국소년'과 유사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1990년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프랑스 출신의 축구스타 에릭 칸토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때 팬을 이단옆차기로 가격한 에릭 칸토나.  동아일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때 팬을 이단옆차기로 가격한 에릭 칸토나. 동아일보

그는 '영국인이 사랑하는 유일한 프랑스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는 1995년 경기장에서 한 영국 축구팬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바람에 2주간 감옥에 갇히는 실형을 선고 받았고, 120시간의 사회봉사 활동, 9개월의 출장 정지를 당하면서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팬이 칸토나에게 한 말이 칸토나의 부모님과 조국 프랑스를 욕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팬들의 여론은 오히려 칸토나에게 동정적으로 흘렀다.

결국 출장 정지가 끝난 칸토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복귀해 팀의 프리미어리그와 FA컵 우승을 이끈 뒤 '영국인이 사랑한 유일한 프랑스인'으로 화려화게 은퇴했다.

칸토나는 그의 이단옆차기가 문제가 됐을 때 "어떤 야유도 참을 수 있지만, 조국 프랑스와 부모님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프랑스 뿐 아니라 영국 팬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지난주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열렸던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남자농구대표팀 허재(46·KCC) 감독이 대회 공식 기자회견 도중 욕설과 함께 퇴장한 장면이 동영상으로 유포돼 화제가 됐다.

허재 감독은 기자회견 도중 "무슨 소리야 그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어, X발 짜증나게"라고 외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 퇴장을 했다.

국제대회에서 그것도 국가대표 감독이 기자회견 도중 욕을 하면서 자리를 박찼으니 팬들의 지탄이 이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로 국내 팬들 대다수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귀국한 허 감독의 말을 토대로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번 대회를 개최한 중국 현지 조직위원회와 중국 기자들의 무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대회 조직위원회는 한국-중국의 준결승전을 앞두고 선수 소개와 국가 연주 순서를 바꿔버렸다.
기자회견 도중 중국 기자가 무례한 질문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던 허재 감독. 사진공동취재단
기자회견 도중 중국 기자가 무례한 질문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던 허재 감독. 사진공동취재단

당초 선수 소개와 국가 연주 순서는 중국을 먼저하고 다음에 한국을 하게 돼 있었지만, 조직위원회는 한국을 나중에 하면 중국 홈팬들의 함성이 경기 시작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순서를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여기에 기자회견에서 나온 중국 기자들의 질문은 무례를 넘어 한국인 허재 감독의 속을 박박 긁어 놓는 것이었다.

중국 기자들은 "왜 한국 선수들이 중국 국가가 나오는데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느냐"는 어이없는 질문을 던진 것.

이에 허재 감독이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퇴장을 한 것.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서 올림픽 성화 봉송이 있을 때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군중을 이뤄 중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는 단체를 향해 흉기를 집어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기자회견장에서 무례를 범한 수준 이하의 중국기자들은 허재 감독에게 한방 얻어맞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하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


▲동영상=허재, 무례한 中기자에 “X발, 진짜 짜증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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